당황했던 기억만큼 책을 빼냈다. 보겠지 다시 보게 될 거야, 당연히 그렇지, 이 책을 다시 사려면... 그런 미련이 여전했지만 일 년 이상 자리만 차지했던 책들을 쑥쑥 뽑아냈다. 한번 손을 대니 다 거기서 거기 같았다.
문 앞에 쌓고 또 쌓고 보니 어깨쯤 높이다. 조금만 더.
여전히 전집으로 산 소설이 장면마다 휘날린다. 그녀가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저 바다 끝 수평선이 아른거리고 그가 애탔던 외로움의 흔적들이 은근한 온기로 밀려와 가슴이 뻐근했다. 그런 집들을 허물었다. 그녀가 멀어지고 그의 눈이 애처롭다. 가거라 그래, 안녕.
키를 넘기고도 훌쩍 한 뼘이 되니 가슴 한편이 후련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누워있던 책들을 뽑아 세워 꽂고 나니 다시 뭉툭하게 꾹꾹 들어차는 책 먼지에 앞이 노랗다. 절판되어 제본했던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넘기며 여전히 현재로 끌고 와 펄떡거리며 보게 될 것 같아 책장 깊숙이 힘주어 꽂았다. 이게 아닌데.
여기서부터 다시 딜레마에 현기증이다. 읽었던 책이라도 가끔 생각나면 아쉬움에 눈물을 쏟을 것 같다.
핑커의 독설을 담은 책들, 그의 희망을 품을 책들을 빼냈다가 꽂았다가 빼서 들여다보다가 다시 꽂았다. 어후, 정말 녹록지 않다.
내 전공이 아니지만 한 글자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공부했던 귀한 책들을 끌어안고 십분, 이십 분, 사십 분... 한 시간. 다음에는 꼭 뺄 거야.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