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이언스 II
[엽편소설] 영생 티켓, 2124년
그가 그러길 원했다. 아이가 없거나 있거나 상관없는 시대가 올 거라 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가 되고 아날로그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그런 때가 온다고 했다.
현재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건 출산율을 조정하여 아이가 거의 없는 사람을 위한 혜택이었다. 삼대에 이어 출생률이 낮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출생률이 낮다는 건 그만큼 거시적인 미래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100년 전인 2024년, 지구의 인구는 이미 120억을 넘으며 적정 인구의 6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조용히 인구 조절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대대로 출산율이 낮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가임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와 내가 아이가 없었던 건 순전히 그의 건강 때문이었지만 그와 나의 윗 세대도 그렇게 대를 잇겠다거나 아이에게 집착하지 않는 소수의 가족 집단이어서 우선 선택이 된 것이었다.
그는 성하지 않은 몸이었고 나는 그의 성하지 않은 몸에 기대어 사는 성한 몸의 여자였다. 정신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상관없었다. 보기에 멀쩡하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면 영생용 적합 판정을 받았다.
나는 가임을 포기하기로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었다. 가임 포기는 1장의 영생 티켓이었다.
그는 내가 영원히 살기를 원했고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자주 보러 왔으면 했다. 그의 성하지 않은 몸은 나의 자연스러운 가임 포기와 이어졌다.
또한 그의 이른 가임 포기로 나는 그를 대신하여 인간의 피부를 가진 AI와 같이 살 수 있었다. 일종의 영생용 AI 배우자였다. 그녀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 했다.
하지만 언제든 싫증이 나면 배터리를 사지 않으면 그뿐이라 했다. 로봇은 구할 수 없는 그 3767-9541 리튬 이온 건전지로 일 년씩 살아간다고 했다. 모습도 목소리도 눈빛도 손길도 모두 그와 똑같다고 했다.
다만 조금 차가울 뿐.
나의 영생 티켓과 바꾼 가임기의 끝 무렵쯤 그의 따뜻한 체온이 식어 갔지만 온기가 모두 빠져나가기 전 작은 디지털 액자에 그를 전사해 넣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세포 원자의 파동뒤에 남은 그의 마지막 뼛가루를 작은 나무 상자에 담고 동그란 디지털 액자로 상자를 닫았다. 내가 올 때마다 디지털 액자를 통해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살았을 때와 똑같은 체온을 느낀다니 그가 없는 슬픔과 그를 느끼는 기쁨이 섞여 회색의 무표정이 되었다가 안타까운 눈물이 되었다가 회한으로 막막한 가슴이 되었다. 정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영원한 생명을 내게 넘기고 그는 평온을 얻었지만, 나는 그와 똑같은 차가운 그를 집에 남기고 소리 없이 슬프게 휘돌다 사라지는 그의 체온을 찾아 거의 매일 먼 길을 온다.
표정 없이 살아가는 나는 매일매일 디지털 액자 속의 온기를 뒤지며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산다.
나는 여전히 피가 따뜻한 사람이다. 그와 똑같은 AI 말고 그가 필요하다.
그가 사는 따뜻한 상자에 가는 중이다.
[영원히 사는 여자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