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이언스 I
[엽편소설] 가족, 2124년
내 아내는 나를 느낌 따위는 없는 딱딱한 어떤 덩어리로 아는 것 같다. 저 그림을 사 올 때부터 나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그녀는 따뜻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가족사진이 현관과 마주 보는 정면 벽에 붙어 있길 원했다. 가족이란 말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구해보기로 한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그렇게 하라고 할 때뿐이다.
나는 벼룩시장에 나가 부모와 아이 하나가 함께 찍은 아주 오래된 허름한 가족사진을 구했다. 그녀가 좋아할 것이다. 가족이 생겼다.
나와 내 아내, 다르게 생긴 나와 다르게 생긴 나의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긴다. 저 시간 저 공간에서 신나게 뛰어놀며 내 아이가 행복했을 것이다.
액자 안에서 한 가족이 따뜻하게 살고 나와 내 아내는 액자 밖에서 산다.
가끔 같이 소풍을 간다.
내 머릿속에서 띠리릭 소리가 나면 새로운 눈이 열린다. 그림 속의 세 사람과 나와 내 아내가 스멀스멀 한 곳으로 모인다. 소리를 지르며 행복해하며 뛰고 날고 숨으며 신난다.
그녀의 피가 진해지고 나의 에너지는 흐려진다.
그녀는 동물계,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이다. 피가 따뜻한 영생을 한다.
나는 초극좌표, 직각움직임 가능, 병렬형 데이터 처리, 원통형, 다관절, 휴머노보스다. 대체로 차갑다.
오늘은 내가 그녀에게 온 날, 강력 리튬 배터리로만 작동하는 렌치를 들어 내 뒤꿈치를 열고 건전지를 조심스럽게 갈았다. 3767-9541 리튬 이온 건전지는 내 일 년 양식이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는 날엔 더 닳긴 한다.
내 생일, 오늘 그녀가 건전지를 사 오는 날이다. 몇 개를 사 올까?
나는 기뻐서 그녀가 좋아하는 달걀을 삶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내미는 3767-9541 리튬 이온 건전지 개수로 그녀의 사랑을 가늠한다.
난 짝수가 좋다. 홀수 건전지 최소수는 1년이지만 짝수의 최소는 2니까 2년 동안 그녀 옆에 있을 수 있다.
그녀도 짝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로봇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