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오늘도 그 먼 길을 걸어 내게 왔다. 매일매일 내 뼛가루로 작동하는 디지털 앨범을 그녀가 터치한다. 나는 스르르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이마나 볼을 쓰다듬기도 한다. 따뜻할 것이다.
눈물 나도록 내가 사랑했던 그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나의 온기를 느끼러 오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90년 동안 매일 오고 있는 그녀, 하지만 왠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오면 나의 온기가 있고 집에 가면 나와 똑같이 말하고 움직이고 바라봐주는 AI가 있는데 뭐가 부족한 걸까. 나와 AI와 온기가 하나이길 바라는 걸까. 그런 날이 올까.
내가 왜 병이 났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일종의 공해병이라고들 했다. 사람 수보다 훨씬 많은 자동차의 매연이 땅 위에 회색 안개층을 이루고 있었고 나는 외출할 때마다 눈이 충혈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미 내성이 생긴 다른 사람들의 삶이 부러운 탓도 있었다.
세상이 흐릿해지는 저녁이 되면 그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귀가하여 그녀가 손을 내밀어 부축해 주면 나는 편하게 눈을 감고 그녀의 향을 따라다니면 되었다.
그녀의 향기가 있는 곳에 내가 먹을 양식이 있었고 그녀를 따라 따뜻한 물이 충분하게 찰랑이는 욕조에 들어가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왜 하필 눈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려는 것이었을까.
나는 그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또렷이 느낄수록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뜨거워지는 눈을 따라 두통과 구토가 번갈아 괴롭혀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었다. 10년을 그렇게 버티며 결국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2024년 2월 21일 그녀의 생일에 그녀 또한 가임 포기 등록을 했다. 그녀가 세상에 나온 날, 다시 세상에 나오기 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삶을 얻게 되었다.
나는 스러져갔지만 그녀가 항상 그 모습으로 살아있을 거라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 나랑 똑같은 AI를 같이 있도록 해주고 떠나게 되어 안심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와서 나를 꼭 빼닮은 AI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우리가 뜨겁게 사랑했던 그 시간을 잘게 쪼개어 되짚어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언제부턴가부터 그녀가 내 온기 위로 눈물을 흘리면 그 짠기가 앨범을 타고 들어와 내 뼛가루에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언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물은 특별하다.
계속 타는 듯한 열기에 디지털 앨범의 액정이 조금씩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린다.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그녀의 눈물이 뜨거워질 때면 내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다. 수억 개의 내 잔해들이 따뜻하게 모여들고 있다. 투명하게 그녀 앞에 서서 그녀를 한껏 받아들이고 나면 점점 불투명이 되어가는 나를 느낀다.
오늘은 그녀의 나를 감촉한다. 나의 그녀를 바라본다. 나를 천천히 돌며 스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시작으로 전율의 업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가장 푸른 온도로.
그녀와 내가 떠난 자리에는 3767-9541 리튬 이온 건전지가 산성비를 맞으며 하얗게 녹슬어간다.
[영원을 얻은 남자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