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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22. 2024

클래식, 할 뻔한

기행

때가 되었나 보다 한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에 빠지거 한동안 멍하다 헤어 나올 즈음이면 다른 색깔의 세상이 앞에서 너울거린다. 얼핏 얼핏 드러나는 것들을 귀에 담아 두었다가 퍼즐 맞추기를 한다.


시간 조각이 들어맞을 때 흥분도가 올라간다. 헐레벌떡 바쁜 시간은 정신을 갉아먹는다. 모서리가 잘 맞는 시간들이 우아한 걸음에 동행하는 여행이 좋다.

 

어디를 보아도 바다라는 곳에 갔지만 산속을 연신 헤매다가 찔금 바다로 통하는 물길을 보고 다시 구불거리는 산길 드라이브를 했다.


바다 바람은 나를 조각 내 찢어 갈 것 같지만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은 쉬었다 가라고 손짓하는 거라고 믿어 왔다.


연두 초록이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것에 홀려 차 문을 열고 한 발짝 나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섬 안의 산은 바다가 주인이다. 차가운 도끼 같은 바람에 뒤통수가 얼얼하다.


그곳의 바다와 산은 오랜 부부 같다. 바다 바람이 그리 세어도 나무를 빽빽하게 품은 산은 바람의 리듬을 받아 안고 춤을 춘다. 괜히 차 밖으로 나갔다가  애틋한 둘의 춤을 방해해서 바람에게 된통 얻어맞은 거다.


콘서트 홀은 만석이었고 나는 꽤 먼 곳에 앉았지만 세 개 무대가 점점 달라지는 크기, 인원, 열기로 분위기가 바뀔 때 세상의 이치와 사람들의 심리를 본다.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향해 직진하며 즐기라 유혹한다. 마치 글쓰기가 그러하다는 작가들과 다르지 않다. 정명훈이 라벨을 연주할 때 그랬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과 내가 빠지는 곳이 다를 때, 꿋꿋하기라는 에너지바를 먹는다.


비슷한 곳곳의 세상을 바라보며 괜한 외로움과 서러움이 차 들어왔다. 다르다는 것이 힘들 때 말을 하기보다 숨을 참는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걸까.


클래식 공연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인간 심리를 탐구하며 꼭지 떨어진 티켓을 입에 물고 돌아왔다. 쇼맨십이 가득한 무대에 이물감이 났다. 신비한 낯섦과는 너무나 다른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대가 새로워질수록 콘트라베이스가 많아지며 중후하고 미세한 울림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고, 바이얼리니스트의 주홍색 옷과 첼리스트의 양말 색깔을 맞춘 것이 흥미로웠다.


생뚱맞게도 내가 넋을 잃고 빠져 있던 것은 바이얼리니스트와 첼리스트의 흔들리는 발이었다.


춤추듯 가볍게 음악 위를 사뿐 거리는 발의 잦은 움직임이, 계속 서서 연주했던 바이얼리니스트가 탱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홍색 여인의 향기가 물씬 났다.


소년의 앳된 모습과 달리 첼리스트는 발랄하고 경쾌한 노련미와 함께 주홍색 양말의 구둣발로 마치 투우사의 춤을 재연하는 것 같았다.


큰 이름 보다, 명성 보다 그들이 선 그날의 무대에 충실한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보고 싶은 수요일 공연은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내 시간을 허락하는 비행기도 없고 기차도 없고 버스도 없다.


마법 양탄자를 빌리던지, 축지법을 익히던지, 그도 안되면 꿈길이라도 활짝 열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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