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기가에서 남은 곰 사진 한 장
다섯 개의 외장하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에 나의 강의 기록과 자료가 모두 들어있었다. 흰색으로 나름 세련된 외모를 자랑하며 용산에 나가 한 차례 고쳐온지 꽤 되는 저장 장치였다. 분명 '용량 40기가 정도 남은'이라는 메모와 함께 '2023년 2월 8일'이라고 날짜도 있었다. 최근 저장한건데.
컴퓨터에 연결하니 바로 삑삑 대고 소리소리 지른다. 무시하고 기다리니 폴더들이 좌라락... 그런데 열리지 않는다. 애간장이 다 타서 녹아버렸다. 왜 거기서 꼼짝을 하지 않는 거니?
저장해 둔 수백 개의 논문 정리 자료랑 수업 토론 양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끝내 품을 내주지 않는 나의 외장 하드여! 아아아아악!
데이터백업 업체에 맡겼더니 비용이 크단다. 일단 최대한 살려주세요. 이틀 후 몇 개의 폴더에 부분적으로만 살려냈다고 연락이 왔다. 나머지 데이터를 살리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거란다. 허공으로 산산이 사라져 버린 내 자료들, 내 시간들.
100메가 정도 살려낸 자료에서도 대부분의 일반 문서 파일들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자료를 살려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속상해서 눈물이 났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버리자! 마음을 비워 버리자! 업데이트할 때가 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2015년 캐나다 여행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제 추억은 그래도 살려내셨군요. 클릭해 보니 허탈하게도 수백 장이 든 폴더가 아닌 달랑! 저 곰 사진 한 장이다. 운전하다 길 옆에서 만나 돌아보는 찰나를 잡았던, 꽃길을 건너는 곰이었다. 곰아, 넌 사라지지 않을 거지?
예쁜 꽃들과 곰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나란 인간, 포기도 빨라 좋다.
그리고 다시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이제는 온라인 드라이브에 쌓아야겠다.
나머지 외장하드는 어떡하지? 끄응!
사진 by 희수공원 2015년, 곰이 나를 '바보'라고 부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