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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Nov 14. 2024

미루다

미루다

눈을 뜨자마자 새우처럼 웅크리며 이대로 새우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빨간 베개를 베고 옆으로 누운 새우의 긴 더듬이는 위로 솟을까 직각으로 뻗을까.


현실을 벗어난 상상으로 머리가 뜨거워지는 익숙하지 않은 흥분을 즐긴다. 갑자기 새우가 되는 꿈을 꾸며 오늘 하루 살 힘을 얻는다. 탈피를 위한 힘을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물을 벗고 가장 연약한 육신은 무방비가 된다.


깨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생물로 그 하루를 보내도 좋겠다.


무생물이 되어야 한다면 베개가 되었을 것이다. 주인이 일어나 나가고 떨어진 머리카락 몇 개만 덩그렁한 베개는 천장을 마주하고 가만히 누워 저녁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주인의 머리카락을 하루 종일 붙들고서 다시 주인의 향기를 기다리는 베개도 좋겠다.


베개도 탈피를 기다린다. 베갯잇을 벗고 속살을 보이며 따뜻하게 몸을 말리고 싶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태양이 밝게 내리쬐는 베란다 한편에서 베개도 이렇게 성숙해 간다.


갑자기 새우가 생각난 건 하루를 잘 보내라는 계시라 믿는다. 성장의 고통을 위한 새우의 탈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새우의 머리를 찬찬히 뜯어본다. 중금속에 오염되기 쉽다는 머리를 어서 털어내야 깨끗한 탈피로 이어진다. 나는 벌써 오염된 걸까.


오늘 나는 친구를 통해 한키만큼 더 자랐다.


바쁜 줄 알지만 꼭 만나야 할 것 같았다며 나를 사랑하는 목소리로 설레게 했다. 서운해하는 눈길에 미안하기도 하고 오랜만의 시간에 기쁘기도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죽은 후 자신을 대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전해 주었다.  


산소도 만들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고 따로 모이지도 말라고 가족에게 전했다고 했다. 그저 어느 시간 문득 자기가 살아있을 때 좋아하는 것을 먹다가 한 번쯤 생각이 나면 그게 자기에 대한 예를 다하는 거라 했다. 아무렇지 않게 차분한 표정에 괜스레 울컥했다.


나이는 오십이면서 마음은 이십 대야, 그런 게 행복할까. 친구는 몸이 오십이 면 마음도 오십으로 사는 게 행복한 거라는 말 한마디로 나의 뒤통수를 한방 갈겼다. 세월을 겪어내며 솔직한 자신으로 사는 몸을 아쉽게 바라보는 세상이 이상하다 했다. 괜한 욕심을 부리는 마음은 편치 않은 게 맞다.


새우의 오염된 머리가 툭 떨어져 나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났다. 이것이 오늘의 탈피였을까.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다면서 자신의 현재로 나를 데려다 두고, 나의 지금을 쿡쿡 자극하고 갔다. 계속 미루다 미루다 언제까지 미루게 될지도 모를 나의 딴전에 결정적인 태클을 걸러 와서는 새우처럼 걸치고 있던 쿰쿰한 허물을 화라락 벗기고 가버렸다.


미루다 미루다 내가 밀렸다. 이런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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