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수공원 Dec 10. 2024

아버지와 쌍화차와 여자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가는 것이 편하고 익숙했다. 졸업하면 바로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혼자 분주히 하고 있었다. 석사든 박사든 하고 싶은 데까지 지원해 준다는 아버지는 또 어떤 조건을 달아 둘 것이 뻔했다.


  그렇게 유학준비로 인한 스트레스로 날카로울 무렵부터 눈에 얼룩 같은 게 보였다. 열기가 오른 눈과 함께 두통이 더 자주 났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둥 치료받으면 된다고 해서 눈 안쪽에 번쩍이는 빛을 쏘는 듯한 치료를 받았다. 그런 사소하게 여겼던 두통보다 어서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싶은 열망에 학교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밤이 늦던 새벽이던 현관을 밀고 들어가면 항상 그 자리에 서서 다정하게 희서를 맞는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잘 생긴 사람들은 대체로 뻔뻔하다. 늘 경계하게 된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심장병을 오래 앓던 엄마가 희서의 중학교 입학 즈음 돌아가신 이후 희서에게 아버지는 사진관 액자에 걸려있는 어떤 사람이 되었다. 차갑게 객관화된 잘 생긴 남자 어른이었다.


  희서를 데리고 예쁜 카페도 가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며 이것저것 설명해 줄 때는 따뜻한 아버지 같았지만, 간혹 찻집에서 의도된 만남인 것 같은 여자 어른을 만나면 희서의 몸이 뻣뻣해졌다.


  중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는 희서를 작은 다방에 데리고 갔었다. 희서는 거기서 쌍화차를 처음 보았다. 쌍화차 앞에 앉아있는 여자 어른도 처음 보았다. 별일 아닌 것처럼 오목한 접시에 노랗게 담긴 달걀노른자를 붉은 끼가 도는 검은 쌍화차에 넣을 때 희서는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려 토가 나올 것 같아 화장실로 뛰어갔다.


  끈적이며 흘러내릴듯한 달걀노른자만 작은 접시에 담겨있는 광경이 아버지 서재의 어느 잡지에서 언뜻 본 모델의 엉덩이 같았다. 잔뜩 오일을 바르고 한껏 눈을 풀어 내리깐 외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그런 아버지의 낯선 여자 어른들은 다양한 버전으로 희서에게 소개되었다. 중학교 이후 희서는 아버지를 따라 나갈 때마다 또 어떤 새로운 무대에 어떤 새로운 사람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을지 이상한 상상을 하곤 했다.


  몸을 향한 웃음은 추하기 짝이 없다. 희서는 아버지의 세상을 통해 너무 빨리, 웃음과 추함과 몸의 예리한 떨림과 손짓에 익숙해졌지만 별달리 아버지에게 말해본 적은 없었다. 남자란 원래 저런 본능이 기본 장착되어 세상으로 나오나 보다 할 뿐이었다. 여전히 새엄마로 확정된 여자는 없었고 꽃을 향한 아버지의 순례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네가 미국에서 돌아올 땐 내가 혼자가 아닐 수도 있어."

  "아버지 인생이시니..."


  더 말하기 싫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은 마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전야제처럼 들떠 있었다.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동후와 준하는 그런 희서의 아버지와는 다른 종 같았다. 순수하게 고뇌하는 모습들, 서로의 시선들, 희서를 동등한 하나의 사람으로 대해 주는 시간들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들만이 나누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고 보통은 희서가 범접하는 게 어려워 그냥 혼자 머물러 있곤 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은 희서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었다. 세 명의 온전한 사람으로는 안 되는 건가.


  준하는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제대로 눈을 맞추지도 않고 과묵해지곤 했다. 희서는 그냥 무슨 고민이 있나 보다 할 뿐이었다.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밝은 에너지,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했던 쾌활함은 다 어디 가고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처럼 은밀하게 혼자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준하 옆에 동후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헤매는 준하를 동후가 지탱해 주는 것처럼 보여서 혼자인 희서는 질투가 나곤 했다. 미주는 내가 그 둘을 부럽게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항상 놀리듯이 묻곤 했다.


  "누구야? 어느 쪽이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