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필리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보이는 것을 소비하며 허비된 시간들이 정신적인 성장이나 순수한 우정으로 건너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좋은 에로스, 필리아의 이면에 육체의 쾌락만을 구하려는 가여운 영혼의 나쁜 에로스가 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었다.
동후와 준하의 대화로부터 꾸준히 건저 둔 플라톤 <향연>의 이런저런 꼭지들이 마음속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동후는 어떻게 그런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걸까? 공학도의 체계적 냉정함을 희서가 오해하고 있는 걸까. 편안하고 고요한 바다 같은 아이다. 미국 환승 수속을 밟으며 갑작스럽게 동후가 그리웠다.
동후의 깊은 눈빛을 기억해 내려는 순간 바로 앞 희서 또래쯤의 여자 아이 하나가 희서의 행복한 시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Oh, my god! I hate this. Look! Look at this long line! Mommy it’s endless… 엄마, 난 이렇게 줄 서는 거 아이 씨… Oh, look at the man! Go! Go! What are you doing there? Oh, man… Just move! 엄마 정말 짜증 나! 왜 이렇게 느린 거야! Go to hell~!”
팔짱을 끼고 따라가고 있었다. 미국 공항 환승구에서 기다리는 줄이 길다며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큰 소리로 온갖 짜증을 내는 이 생명체를 참아야 하나. 희서의 귀로 들어오는 저 두 개 나라 언어를 짬뽕한 날카로운 소음들을 그저 튕기고 있어야 하나. 미국에 도착한 첫날 희서의 첫 목소리는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조용히 해라. 여기 공공장소잖아. 전화는 나가서 해! 불평도 나가서 하고! 소음 공해. 듣기 싫으니까 제발 조용히, okay?”
“What are you talking about? Not your business! Fuck off!”
“무슨 말을 하냐고? 참견 말라고? 꺼지라고? 줄 서기 싫으면 저기 직원한테 가서 애원이라도 해봐. 긴 줄에 서서 짜증 내면서 분위기 흐리지 말고! 그 입 안 다물면 지금부터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희서는 이 소음공해를 압도할 만큼 눈을 마주 보며 차갑게 비웃고 있었다.
“창피하지도 않아?”
“I can’t understand. What are you talking…”
“너 한국 애인 거 다 알아. 그냥 조용히만 해. The end! Okay?”
속은 부글거렸지만 거기까지만 했다. The end라는 표현과 단호하고 짧게 ‘이제 그만’이라는 신호를 주며 희서의 두 손이 수평으로 흔들리자 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아이는 소음을 더 내지 않았다.
미국에 발 디딘 첫날부터 희서의 온도는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 어차피 그다지 정상스럽게 고분고분 살아온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 마음대로 살아볼 테다 하는 그런 오기가 솟았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부정적인 힘에 다시 튕겨 올라 긍정으로 갈아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미국은 새롭고도 낯선 세계였다. 희서의 낯섦은 코네티컷 공항 환승구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몇 년 간, 혼자서 여행했던 몇몇 새로운 경험을 빼고는 지독하게 공부하고 꼬리를 물고 토론하고 지도교수와 상담하고 뛰어다니며 아르바이트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아버지에게서 경제적으로 어서 독립하고 싶었다.
희서는 진정한 자유를 위한 아버지와의 끝을 절실하게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