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닥친 아버지와의 비정상적인 끝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갑자기 한국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했다. 희서와 진하게 연관된 핏줄의 흔적들을 누군가 있는 힘껏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매일 이상한 한기와 두통으로 잠에서 깨곤 했다.
정말 혼자가 되었다. 철저히 아무 데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손만 뻗으면, 눈길만 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천천히 희서에게로 조여 들어와 터질 듯한 압력을 참으며 살아야 하는 그런 진공 상태가 되었다.
엄마가 희서 앞에서 하얀 얼굴로 떠났듯이, 나쁜 에로스의 상징이었던 아버지가 나도 모르는 어느 길에서 사고를 당해 떠났듯이 그렇게 예정된 죽음과 예정되지 않은 죽음이 내 삶을 채웠다. 관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플라스틱 인형 같은 핏기 없는 차가운 얼굴이 아버지가 내게 각인시킨 마지막 메시지였다. 결국 모든 건 하얗게 사라진다.
'잠깐 만났으면 해요. 집으로 올 수 있나요?'
희서에게 집이 있었던가. 아버지 장례식 후 호텔에 머물며 필요한 서류 절차를 하나씩 마치고 있었다. 여자 어른은 현관 앞에 멈칫거리던 희서에게 눈인사를 했다. 따뜻한 국화차 향기가 났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지며 두통과 함께 눈에 열이 올랐다. 감동받아 눈이 뜨거워지는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집의 소파를 보자 이상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영영 없을 집에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차분함이었다.
"아버지 물건들을 정리했어요. 그러다가 이걸... 희서 양에게 전해야 할 것 같아서..."
희서 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여자 어른이 저만치 멀어져 나를 심판하는 판사처럼 느껴졌다. 반쯤 사용한 아버지의 작은 다이어리였다. 서둘러 일어나 나오려는데 여자 어른이 일어나 눈을 맞췄다.
"이제 저는 떠나요. 정리할 시간을 줘서 고마워요."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들은 법대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저는 곧 미국으로 떠납니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온기가 말 대신 전해왔다. 저런 표정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여자 어른도 아버지를 사랑했던 걸까. 희서는 지금까지 뭔가 잘못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둘러 호텔에 돌아와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이 점점 뜨거워져서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다 타버려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제야 눈물이 났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꾸역꾸역 올라와 멈춰지지 않았다. 참지 않아도 되는 눈물인데도 온 힘으로 틀어막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이어리는 진한 갈색 가죽 표지가 닳아 해져서 오래돼 보였다. 왜 이걸 봐야 하는지 문득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냉담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딸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현실과 다르게 적혀 있는지, 혹 희서가 여전히 모르고 있던 어떤 은밀한 비밀이 남겨진 건지,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에 그녀는 다시 냉소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사람, 거기서 잘 있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