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페이지를 펴자 아버지가 썼다고 전혀 상상하지 못할 짧은 시작이 잠시 숨을 멈추게 했다.
‘희서는 중학생이 되었소. 교복 입은 모습을 당신도 같이 보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군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아버지는 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하신 것 같았다.
‘당신과 같이 있을 때 당신을 더 조심조심 아껴주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내가 당신의 심장을 모두 내 것으로 가져온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로맨틱했던가. 희서는 완전히 낯선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약한 심장을 내가 너무 뜨겁게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렇게 빨리 타버린 것은 아닌지…’
다이어리를 닫았다. 문체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의 가벼운 존댓말과 같았지만, 희서와 같이 지냈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이 간극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애틋하고 슬픈 사랑을 잃고 가여운 죄책감에 고뇌하는 사람의 고해서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때가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당신의 하얀 얼굴과 미소가 나에게는 구원이었어요. 그 가느다란 팔로 나를 꼭 안아줄 때 세상의 중력이 모두 없어진 것 같았다오. 내가 항상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원했었는지...'
희서는 또 다시 다이어리를 엎어 놓았다. 이걸 어떤 버전으로 읽어야 할지 혼란이 왔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렇게도 애절히 사랑했었던가.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 사이의 온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조용한 엄마,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차분하게 평화로운 미소만 짓고 있던 엄마, 그런 엄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 정도가 희서가 기억하고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부부의 일상이었다.
식탁에서 둘이 서로 바라보며 조용히 웃거나, 마치 눈으로 뭔가 이야기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두 분에게는 습관 같은 거였어서 원래 부부는 저런가보다 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희서가 아버지에 대해 폭풍 같은 감정, 아니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일 년쯤 후부터 이상한 여자 어른들을 만나고 다니며 그 자리마다 희서를 데리고 나간 것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말투와 행동이 엄마에게 하던 것과는 너무 달라 희서의 사춘기를 여러 번 부끄러움에 치를 떨게 했었다.
다이어리를 읽다 보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엄마를 향했던 고결한 감정들이 어떻게 그런 천박한 관음증으로 변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온갖 가식으로 사셨던 건가. 본능으로 회귀라도 하셨던 건가.
여전히 반쯤 남은 다이어리가 희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도 희서를 지켜보고 있겠지요. 우리에게 온 선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말이오.’
희서의 이름이 자주 나오면서 일상적인 딸의 성장 일기를 쓰기로 하셨나 보군 하려던 찰나였다.
‘우리 희서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오.’
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은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딱히 생각나는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