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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Dec 12. 2024

마지막이 주는 신호

  한 사람이 오롯이 굳건하게 독립한다는 건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 사춘기와 이십 대를 보내면서도 희서가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할 때마다 그런 독립 따위는 계속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인 독립은 가장 절실했지만 가장 힘든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원하는 만큼의 공부를 하려면 꾸준히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통장 잔고는 부족하지 않았지만 희서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잔고는 항상 마이너스였다. 잠을 줄이고 쓰는 것을 줄이는 것 외에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성적과 활동을 다양하게 하면서 장학금을 받는 일이었다. 그리고 빨리 끝낼 수 있는 과정을 최대한 앞당기는 것, 아버지에 대한 지저분한 찌꺼기 같은 마음의 앙금이 희서를 더 독하게 만들고 있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국에서 유학온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학교에서 간간이 나오는 설문조사 아르바이트나 번역 통역 일을 꾸준히 했다. 그 덕에 학비를 제외한 희서의 생활비는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지원한 박사 과정에서도 장학금이 승인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아 기쁘기도 했지만 꾸역꾸역 몰려오는 불안함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아버님이 사고를 당하셨어요. 한국으로 와야 할 것 같아요."


  차분하게 할 말만 전하고 전화를 끊는 이 여자 어른은 누구일까. 한국으로 와야 할 것 같다는 것은 사고가 치명적이라는 말인가. 세상에 핏줄이라고는 달랑 아버지뿐이니 희서 감정이 어떻든 간에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의 정착을 꿈꾸던 이때 한국에 다시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행 비행기에 타자마자 두통이 나기 시작했다. 눈이 뜨거워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작은 와인 한 병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한국에 도착해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서울대학 병원 장례식장 1호실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미국에서 오는 동안, 희서가 기내에서 술 먹고 자는 동안 모든 게 허망하게 끝났다는 건가. 지난 3년간 서로 학비 얘기 이외에는 해본 적도 없는 아버지와 이제는 어떤 얘기도 할 수 없다. 아버지와 이런 끝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끝이길 바랐다. 희서는 이제 당당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인생은 때로 짧은 한 순간에 다른 색깔로 돌아선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혼자구나. 만족하니? 희서는 자신에게 드디어 혼자라는 것을 중얼거리며 각인시키면서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희서야! 얼마나 마음이 아프니. 멀리 있다가 소식 듣고 많이 슬프고 애통했겠구나."


  준하와 동후가 내 앞에 서 있었다. 3년 만에 드디어 희서가 바라던 아버지와의 끝이 이루어지는 그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여전한 둘의 모습이 꿈처럼 몽롱했다. 희서는 무슨 말을 했는지 밥을 먹으라 권했는지 커피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두 극단으로 갈라놓았던 죽은 아버지와 살아있는 두 대학 동기, 두 세계가 만났다가 한쪽 세계가 홀연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살던 여자 어른은 희서가 중학교 이후 만나오던 여자 어른들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묘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눈웃음을 치지도 않고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잔잔한 슬픔을 시간에 맡기고 그저 조용히 보낼 뿐이었다.


  "이곳에 계속 머무셔도 됩니다. 마음이 정리되시면 연락 주세요."


  고인이 된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아버지는 저 여자 어른을 사랑했었을 수도 있겠다는 먹먹함이 희서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란 가능성을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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