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이어지는 길

by 수의서재

기억의 색깔은 떠올릴 때마다 다르다. 해가 들어오는 커다란 창가에 서서 떠올리는 기억은 햇빛에 바랜 흐릿한 회색이기도 하고, 와인에 취했을 때의 흔들리는 기억은 긁힌 손가락에서 물에 떨어져 퍼지는 핏 빛 같은 불안한 핑크이기도 하다. 소리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막막함이다.


준하는 회색이었다가 다시 밝았다가 푸른 에너지를 주기도 하고 붉은 열정을 생각나게도 하는 친구였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다고 했던가. 왜 그게 예술대학 소속인지 난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준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동후 없이 준하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 둘을 얼마나 질투했던가. 세 사람으로 같이 속해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들에게 희서는 항상 그들 둘과 신희서였다. 우리와 신희서라는 말에는 그들의 세계와 나를 가르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항상 궁금했던 그들 둘의 사이였다. 규정할 수 없어 혼자 답답해하던 신희서라는 아웃사이더에게 준하가 연락을 한 것이었다. 사실 만나자고 한건지도 잘 모를 문자메시지였다.


‘주고 싶은 게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에게 줄 게 있다는 짧은 메시지의 의미가 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줄 게 뭔지부터 물어야 할지 만나서 얘기하자고 해야 하는 건지 그냥 프런트에 맡겨도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이상한 혼란에 한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주고 싶은 지 알려줘.’


답신을 보내고 나서도 희서는 자기가 보낸 답신의 모호함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냥 알았어 만나라고 하면 될 것을 상대에게 책임을 넘기려는 비굴함이 느껴졌다.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읽힐 수도 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호의로 느낄 수도 있다. 유치한 밀당 같기도 했다. 밀당이 가능한 관계였던가.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복잡할 때 답신이 왔다.


‘학교에서 만나.’


학교라는 단어를 읽자마자 갑자기 삼 년 전으로 강제 소환되는 느낌이었다. 왜 하필 학교에서? 동후와 항상 함께였던 학교라서? 둘과 희서의 사이가 항상 일정했던 그 학교에서 뭔가 전해준다는 거구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준하, 넌 변하지 않았구나.


오랜만에 학교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만났었으니 떠나기 전에 책이라도 한 권 선물하겠다는 건가.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학생회관 앞에서 만난 준하는 희서를 예술대학 건물로 데리고 들어갔다. 커다란 작업실에는 천들이 어지럽게 놓인 탁자와 한편에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몸통 이곳저곳에 핀을 꽂은 마네킨이 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나중에 호텔 가서 열어봐.”


희서는 준하가 건네는 작은 상자를 어색하게 받아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서로 다른 삶의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