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습득하는, 충동구매 후 낯설게 정착한 나의 안식처
'한번 가보자. 그냥 구경만 해.' 갑작스레 끌려 나간 곳은 남편이 나를 위해 고민하고 골라두었다는 곳이었다. 공기 좋은 곳, 게다가 투자 가치까지 있다는 아파트였다.
서울은 사랑하는 내 고향이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한강과 한강 다리들이 아름다운 곳. 그런데 나는 일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터질 듯 뜨거워진 두 눈을 참아내고 있었다. 눈 아파.
근교 수도권 도시의 대로변, 번화한 상가 옆, 산 밑, 이렇게 세 곳을 휘저어 다니며 '언젠가 곧 이사를 한다면' 이 중에서 한 곳을 골라서 가자고 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 언젠가 할 거라면 지금 해요.
산 밑 허름한 아파트를 꼭 집어 우린 바로 그날 계약을 했다. 처음 간 재래시장에서 충동적으로 집을 산 꼴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고치면 된다.
게다가, 높다란 상가들의 휘황한 불빛과 복잡한 거리를 현기증 참아내며 지나다녔던 이 근처에 내가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는데 우린 왔다.
집을 고치고 작은 종량제 봉투에 방울토마토 한 박스씩 넣어서 우리 라인 서른 다섯 집에 오르락내리락 돌렸다.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공사로 불편하셨을 텐데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모도 끼워 넣었다. 외로운 타지 느낌을 치우고자 영역 확대를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꼭대기 층 할아버지께서, '복숭아 잘 먹었수~' 할 때 '그건 복숭아가 아니고 방울토마토였다고요!'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저 갑작스러운 외로움이 한 겹 더 생겼을 뿐.
위층 코 고는 소리마저 거슬리고 아이들이 자정까지 뛰는 층간 소음에 기겁을 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인터폰을 했다.
'아이들이 어리니 한창 뛰어 놀 때군요. 그럼 밤 10시까지는 펑펑 뛰어놀게 해 주시고요, 그 이후에는 꼭 재워주시면 좋겠습니다. 밤 10시까지는 아무리 뛰어도 괜찮아요. 저희 집은 10시에 자야 해서요.' 아이들 엄마는 울먹이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적절한 시간에 조금 더 편안하게 내 눈을 쉬게 할 수 있었다.
달랑 아파트 한 개 라인에서도 편한 영역을 가지는 게 참 힘들구나.
근처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3~5라는 숫자만 보고 초등학교 3~5학년 아이들에게 영어 스토리북을 읽어주는 줄 알았는데, 첫날 주섬주섬 영어책을 펴고 있는데 작은 아가들이 엄마 손을 잡고 들어왔다. 눈 씻고 다시 보니 3~5살이었다. 눈을 바꿔야 하는 거냐, 뇌를 바꿔야 하는 거냐.
세 살 아이가 머리를 붙잡고 흔들어도, 뒤 편에 다소곳 두었던 내 가방을 뒤집어 쏟아 놀며 천진하게 웃어도, 책을 읽고 독후 활동을 하며 킥킥거리며 즐겁던 나의 일 년이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아가들 만나는 기쁨에 일 년 동안 십 년쯤 젊어진 거 같다. 웃으며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시에서 주는 성실상쯤 되는 상도 받았다. 뿌듯뿌듯.
그렇게 나는 우리 동네에서 야금야금 영역 확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까지 1킬로 확장이다.
지금은 집과 내가 사랑하는 교습소까지 1.5킬로여서 조금은 더 확장한 셈이다. 이 정도 확장이면 인생 성공이라고 혼자 다독여본다. 비 오는 날, 장화 신고 물웅덩이를 첨벙이며 풀쩍풀쩍 걸어가곤 하는 나의 1.5킬로를 사랑한다.
요즘은 내가 6년간 넓혀 온 반경 1.5킬로 밖을 기웃거리며 산다. 샅샅이 살면서 조금씩 넓혀 가면 된다.
아픈 눈을 감고 집을 헤맬 때마다 미래가 두렵지만, 나는 지금 좋은 곳에 좋은 사람들과 있으며 나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는 중이다. 이 의식들이 의식적이지 않은 순간에 내 눈 안에 편안하게 침잠하고 싶다.
우리 동네가 나를 받아들여 습득하고 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