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취기를 몸에 감고 준하와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준하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희서는 따뜻한 국화차를 만들었다. 흰 도자기 주전자에 차를 우려 작은 찻 잔에 따랐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준하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파티의 열기를 담았던 재즈를 내리고 드뷔시를 올렸다. 드뷔시의 묘한 이국적인 감성들이 준하와 희서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판화의 첫 곡인 탑tower이 상상하게 하는 신비한 세상이 국화향을 더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클래식과 차의 조화가 상상 이상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피아노 선율이 그라나다의 황혼을 지나 붉은 노을을 떠올리게 했고 정원의 빗소리를 듣는 듯한 경쾌함을 지나 달빛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드뷔시의 음악을 따라 희서는 준하에게서 받은 두 개의 실크 나이트 슬립 상자를 열었다. 여전히 진주의 핑크가 은은한 흰색의 실크 슬립에 대해서는 준하에게 들은 것이 없었다. 준하는 아름다운 그 진주 핑크를 담은 실크 슬립을 꺼내 희서에게 건넸다.
머뭇거리며 가까워지는 후텁한 공기가 둘을 이어주고 있었다. 경계하던 눈이 빛으로 열리고 희서가 마주한 길에 준하가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이런 거리였던가. 다가가는 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그런 거리가. 무엇인지 모르게 끝없이 이어지는 흔적을 그냥 따라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부터의 열기와 그 휘몰아치는 돌풍 같은 온도가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더 예민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숨소리를 따라 그저 아주 조금씩 닿았다 떨어지는 이마의 끈적한 뜨거움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안으로부터 흐르는 통증과 탄식은 어쩔 수 없는 간절함으로 몰아쳐 참아낼 수 없다, 아, 이런 건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 걸까.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그렇게 끝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지나다가 멈추고야 만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황홀감이 너무도 선명하게 가득 차서 인생을 모두 건 것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다. 어떤 대가가 있더라도 그대로 지키고 싶은, 단 한번 단 한 사람과의 끝없는 시간은 그대로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았다.
희서는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준하를 향해 속삭였다. 내가 너의 그런 시간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