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는 일 년 전 희서의 생일을 행복한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희서 또한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행복과 웃음과 재즈와 춤, 그리고 준하와의 그 시간들은 살아가는 동안 희서의 숨소리가 가장 진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하얀 실크 슬립을 입었던 그날, 그리고 거의 일 년이 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미주는 자기 집에서 희서의 생일을 보내자고 했다. 작은 홈파티를 하며, 사는 얘기를 나누고 웃으며 춤추며 보내게 될 시간들을 상상했다. 희서는 준하를 만났던 그 시간을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어서 미주와의 파티는 생일이 이주쯤 지난 주말에 하기로 했다. 생일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저려왔다.
스스로 더 사랑해야지. 가족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으니 희서 자신을 가장 아끼는 가족으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아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쓸쓸함과 고독이 그 뒤에 버티고 있었다.
결국 혼자잖아. 무언가에 열중하다가도 그런 생각을 들면 바로 눈을 꼭 감고 상상을 했다. 희서 안의 희서, 희서 밖의 희서, 다독이는 희서, 도발하는 희서, 그리워하는 희서, 냉정하게 일어나야 하는 희서… 이 모든 희서들이 방황하며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기도 했다. 준하가 너무 그립다. 연락 없는 준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게 준하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다.
생일에 맞춰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가끔 혼자 갈 때마다 묵는 하얀 펜션이랑 자동차도 렌트했다. 희서를 줄줄 흘리고 다녀도 뭐라 하지 않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웃고 울고 음악을 듣거나 춤추고 싶었다. 서른으로 넘어가는 언덕 꼭대기에서 혼자서 오롯이 희서 자신을 느끼고 싶었다.
비 내리는 제주는 후텁한 공기로 희서를 맞았다. 렌트한 작은 지프에 아무렇게나 짐을 싣고 나서 해안도로를 달렸다. 바다는 하얗게 손을 까딱거리며 잘 왔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 비를 맞으며 한참을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바다 끝, 무엇이든 어디든 끝이 있다.
여전히 희서를 채우고 있는 준하가, 끝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희서가 준하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끝은 아니지? 준하는 희서에게 흰색 실크 슬립을 준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흰색은 희서와 준하에게 단 하나의 영원한 시간을 가져다준 색깔이었다.
눈물이 비와 함께 흘러 바닷가의 까맣고 거친 작은 바위 구멍으로 똑똑 떨어졌다. 한껏 눈물을 흘려도 비가 어루만져 다독이는 낯선 곳이 좋았다. 눈물도 슬픔도 외로움도 다 비가 가져가 버리길 바랐다. 서울로 돌아가면 씩씩하게 신나게 친구들 앞에 서고 싶었다. 최소한 겉모습 만이라도 밝고 명랑하게 보여야지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차에 타 스웨터를 꺼내 걸치고 숙소로 가던 길이었다. 하마터면 앞 차를 받을 뻔하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앞 차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거리감을 잃은 것 같았다.
갓길에 세우고 두통에 뜨거워진 이마를 만지면서 문득 느낀 건 한쪽 눈이 이상하게도 흐릿하게 울렁거리며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이 터질 듯 뜨겁게 아파 꽤 오래 갓길에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