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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이븐

by 희수공원

블루 헤이븐은 마치 희서를 기다렸다는 듯 가라앉은 우울로 푸르스름하게 어울거리고 있었다. 지난번 왔던 그 모습처럼 문 가장자리를 따라 안쪽의 불빛이 차분히 흘러나왔다. 문을 여니 안개 자욱한 뿌연 무대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Desperado를 저렇게 눈물 나도록 슬프게 부를 수 있구나.


The sky won't snow and the sun won't shine.

눈도 내리지 않을 것이고 햇빛도 비치지 않을 거야.


그럼 좀 편해지는 건가. 눈이 내리지 않으면 연인들은 모두 어디를 걷지? 하얀 눈 속을 같이 걷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운 거잖아.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에 웃음을 담고 눈물도 담고 따뜻한 온기도 담아 세상에서 단 하나의 행복인 듯 느끼게 해주는 게 눈인데 말이야.


햇빛이 없으면 우린 고독의 늪에서 사라져 버릴 거야. 아무런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곳 일 테니까. 아침마다 건조하게 일어날 때 실오라기 같은 햇살조차도 생명을 주잖아. 하루의 생명, 일주일의 생명을 새벽마다 아침마다 받아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잖아.


You're losing all your highs and lows

너의 모든 행복과 불행을 느끼지 못하지.


난 행복이 어떤 건지 이미 알아버렸어. 준하가 고백을 했을 때, 준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홍 실크 슬립을 주던 때, 하얀 실크 슬립 속의 나를 바라볼 때, 우리가 함께 했던 그 두려운 통증의 시간들이 앞으로는 결코 없을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절절함에 눈물 흘렸을 때를 잊지 못할 거야.

그런 시간을 안고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는 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당장 내일 준하가 올 수도 있잖아.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는 게 가능한 걸까? 자신을 전부 온전히 다 줄 수 있는 시간은 딱 한 번만 오는 거잖아. 준하가 나의 유일한 단 한 번의 시간이야.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before it's too late.

그냥 누군가 널 사랑하게 하는 게 낫지, 너무 늦기 전에 말이야.

마음을 후비는 가사에 혼자 속으로 대꾸를 하는 희서 자신이 이 떠들썩한 바에서 가장 외로운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를 입속에 머금고 턱을 괴고 앉아 Desperado를 마음으로 들었다. 밴드의 노래는 Hotel California로 흘러 들어갔다. 오늘은 블루 헤이븐이 이글스라는 밴드를 기억하는 날인가 보구나.

You can check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체크아웃은 자유지만, 넌 영원히 나가진 못해.

항상 이 가사에서 멈칫거리며 소름이 돋곤 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좌절의 상황, 마치 꿈속에서 가위에 눌려 발이 얼어버려 움직이지 못하는 공포가 그대로 전해오곤 했다.

체크아웃은 했지만 나가지 못하는 호텔은 희서에게 괴기스러운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호텔 주변을 영원히 돌아다니다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돌아다니다 체크아웃을 다시 하러 들어오는 공포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했다.

마치 시지프의 똑같이 반복되는 공포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시지프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준하의 시지프는 희서에게 준하를 데려다주었다. 지금 희서는 시지프의 운명인 건가. 어쩌면 정말 희서가 그런 상황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에 한기가 왔다.

뿌연 어둠 속에 앉아 노래가 데려다주는 곳으로 마음껏 헤매며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흔들거리다 눈을 뜨면 여기저기 칵테일을 마시거나 와인이나 꼬냑을 마시는 사람들이 물속의 수초처럼 너울거리며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간으로 흐르고 있는 블루 헤이븐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젠 울지 않을 거야. 그래 이제는…’

갑작스러운 어떤 순간이 그저 툭 하고 올 때가 있다. 희서 자신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떤 특별한 각성 같은 거였다. 문득 희서가 원하는 색깔대로 사는 시간, 그렇게 남은 삶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저… 같이 앉아도 될까요?”

희서에게 말 거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희서는 앞에 와 서 있는 여자를 감정 없이 물건처럼 올려다보았다. 짧은 커트를 하고 취기가 얼굴에 가득한 여자였다. 고개를 한번 까딱거리며 얼음 위에 갈색으로 찰랑이는 잔을 들고 희서에게 웃으면서 눈을 맞추고 있었다.

꼬냑인것 같았다. 꼬냑은 향이 은은하지만 짙다. 흘러내리는 그 향에 홀린 듯 희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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