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서는 제주에 가면 언제나 애월로 향한다. 절벽 위에 뜬 달이라는 로맨틱한 의미의 애월에는 희서의 첫 제주 여행 때 묵었던 하얀 숙소가 있다. 네모 반듯한 작고 하얀 펜션에는 희서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있다.
커다란 욕실에는 빨간색 세면대가 흰 도자기 받침으로 고정되어 현대적인 느낌이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욕실 모든 벽면의 위쪽 반이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샤워 후 몸에 남은 물방울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퀸 사이즈 침대가 높게 놓인 방에는 노란 불빛의 차분한 샹들리에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샹들리에 불 빛 하나하나가 좋은 기억들을 떠 올리며 잠이 들 수 있게 한다. 거실의 빨간 냉장고, 투명하게 속이 다 보이는 커피 내리는 기계랑 넉넉하게 놓여있는 카모마일과 원두커피는 샤워 후 마시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조차도 내내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커다란 TV가 있지만 거의 보진 않는다. 그 보다 TV 앞에 놓인 작은 티 테이블과 푹신한 유럽풍의 꽃무늬 소파가 퍽 마음에 들어, 피곤하면 긴 소파에 담요를 덮고 편하게 누워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작은 소파에서 다리를 위로 모으고 무릎에 책을 올려 편하게 기대어 읽곤 한다.
게다가 애월에는 희서가 좋아하는 블루 헤이븐이라는 바가 있다.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거나 커피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혼자 가도 부담 없는 미국의 분위기 있는 펍이랑 비슷했다. 블루 헤이븐, 파란색의 안식처나 우울한 안식처로 해석되는 미묘한 중의적인 의미도 끌리는 클럽이다. 가끔 미국이 그리울 때 여행 계획에 꼭 넣는 그런 곳이다.
준하와의 일주년이기도 하지만 희서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혼자 온 이번 여행이다. 어스름한 저녁 드라이브에 잠깐 눈이 아팠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오는 스트레스 증상으로 별거 아닌 거 같았다. 숙소에 들어오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마실 것을 사려다 와인 코너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아, 와인... 아, 안 마시기로 했잖아... 와인 라벨을 하나씩 읽으며 지치기를 기다렸다고나 할까. 까스따뇨 쏠라네라, 카르멘 그란리제르바 까베르네쇼비뇽, 1865 셀렉티드 빈야드 말벡, 어려운 이름들을 꾸역꾸역 읽다가 마시던 와인을 손으로 쑥 뽑아들 뻔했다. 아, 아니야.
눈이 뜨거워질 때쯤 여섯 병이 담긴 탄산수 세트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와인에 대한 집착을 참는 건 외로움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견딜 수 있다고 외치는, 더 무너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거였다. 동후가 옆에서 매번 챙겨주어 편하고 고맙고 따뜻한 것과는 다른 커다랗게 움푹 파인 상처의 묵직한 통증이 항상 희서와 함께하고 있었다.
사 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고 블루 헤이븐으로 향했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너무 그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