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후는 사소한 핑곗거리를 큰 축하 행사로 부풀려서 환하게 웃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희서에게 왔다. 다시 시작한 공부가 갑자기 재미있어졌다느니 학교 식당에 자기가 좋아하는 닭칼국수가 나왔다느니 하며 별 시답지 않은 꺼리들로 축하한다며 장을 봐다가 요리를 해 내놓았다. 때로는 시장에서 스테이크 재료를 사다가 허락하지도 않은 희서의 주방을 뒤져 미디엄웰던의 선홍빛을 얇게 품은 스테이크를 커다란 도자기 접시에 담아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무슨 좋은 일이 동후에게 있었던 날이었다. 학부 전공인 환경공학과 석박사 통합 과정의 공부량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동후는 변함없이 꾸준했다.
초등학교 두 곳에서 일주일에 하루씩 가서 세 시간 수업을 하고, 다시 강의하게 된 대학에서 두 과목을 가르치는 희서는 너무 바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데이터가 쌓일 때마다 분석을 해야 했고 미국의 지도 교수와 전화와 화상 회의로 빽빽한 일정을 근근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동후도 희서도 서로에게 마냥 편하고 든든하고 특별하고 각별한 친구였다. 좋은 형용사들이 있다면 더 붙이고 싶을 만큼 믿고 기댈 수 있는 친구였다. 조금씩 동후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웃어넘기곤 했다.
동후와 눈 맞추며 한껏 웃으며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도 언제나 미안한 건 희서였다. 희서만 아니었으면 동후가 원하던 길을 차분히 가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그래서 더 동후에게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잔잔한 생활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뜨거운 두통을 빼곤 몸도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 데이터 정리를 오랜 시간동안 하거나 컴퓨터를 너무 많이 사용하니 눈이 피로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동후가 차를 만들어 서재로 들어와 가끔 농담을 해서 서로 웃곤 했는데 그럴 땐 마치 둘이 부부 같기도 했다.
"네 눈 속으로 컴퓨터가 빨려 들어가겠어! 우와, 집중하면 넌 눈에서 빔이 나오는구나? 외계인 아냐?"
"우와, 어떻게 알았어? 나도 가끔 그런 생각하거든. 컴퓨터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컴퓨터 양쪽에 뭔가 시커멓게 움직이면서 나한테 말을 거는 거 같아. 네가 올래? 아님 내가 갈까? 그러면서 말이야. 하하하!"
그러다 거실로 나와 눈 맞추며 차를 마시곤 했었다.
가끔 미주가 아기를 데리고 희서에게 놀러 오기도 했다. 아직 돌이 안된 미주의 아기는 정말 손으로 톡 만지기도 어려울 정도로 하얗고 약해 보였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아기를 신기해하느라 희서는 아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숨 쉴 때마다 작은 동산 같은 배가 움직일 때는 너무 귀여워서 오오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따뜻하게 올라오는 배에 살짝 손이라도 대면 아가는 발을 차며 까륵까륵 소리를 내곤 했다.
아가들은 천사가 맞대. 미주는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배 속에서부터 아기의 날개가 확실하게 느껴졌었다면서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올 때 날개에 엄마가 다칠까 봐 그 날개를 너무 꼭 접어서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라고 했다. 우린 미주의 얘기에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지만 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기는 천사의 엄마라면서 깔깔대며 신나 했다.
미주가 아기를 데리고 오는 날에는 동후가 와서 아기를 봐주곤 했다. 희서와 미주가 여유 있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동후에게 항상 고마워했던 희서는 동후가 그녀의 시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서가 바라보는 곳마다 동후가 있었다.
문득 서로가 너무 익숙한 습관이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는 게 더 익숙하고 떨어져 있으면 허전하고 궁금한 친구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현실인 걸까. 동후는 행복한 걸까. 희서의 편안함은 사실 동후를 향한 미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