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세이] 마음대로 번역행동학
누군가 너무 그리운데 볼 수 없을 때, 만나자고 할 수 없을 때 눈물은 나고 울 수는 없고, 그럴 때 하늘을 봅니다. 그러면 눈물이 귀 뒤로 빨리 사라지지요. 그런 날이 있었어요. 보고 싶다. 마음을 브런치에 올리고 나서...
이숲오 작가님의 '관계노이즈'를 읽었습니다. 노이즈라뇨! 발끈, 한 번 읽고 그랬습니다. 노이즈인가 봐. 두 번 읽고 주춤합니다. 세상에! 노이즈 맞는구나! 이 노이즈를 내가 가져야겠다.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어로 이 철학을 제 것으로 만들기로 했어요. 행동 들어갑니다! 겁도 납니다.
앞 몇 줄을 끄적거리다가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허락을 구하는 댓글을 했습니다. 일이 커집니다. 그냥 있을 걸 후회는 이미 늦었습니다. 책임을 질 수 있을지 가늠도 하지 않고 행동부터 들어가는 나쁜 습관이 도졌습니다.
작품으로 무작정 들어가기로 했어요. 거기가 머리를 쥐어뜯는 고뇌의 시작입니다.
저의 셀프 대화식 번역행동학 시작합니다.
관계 노이즈 by 이숲오
Noise in Relationships by @이숲오 eSOOPo
모든 관계에는 노이즈가 발생한다.
Noise occurs in every relationship.
관계라면 둘 이상이니 모든 관계로 일반화가 가능합니다. 예외는 없어요.
자동차소리도 내연기관에서보다 타이어가 노면에 마찰해 나는 소음이 더 크다.
The noise produced by a car skidding on the street is louder than the interior noise.
바퀴와 길이 만나며 마찰하는 소리를 감지합니다. 비명일수도요. 혼자서 속삭이는 것보다 당연히 큽니다.
개개인의 목소리보다 상호 간의 심리가 더 요란하다.
Mutual psychology is often noisier than individual voices.
자동차에 비유한 이전 표현의 재진술이군요. 사람으로 돌아와 깊어지는 시점, 저는 단순 번역자가 아니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빠지기로 했으니 저를 마음껏 이입시키기로 합니다.
잡음은 사운드에 국한되지 않는다.
Noise is not limited to sounds.
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sounds를 규칙을 가진 잘 정비된 신호로, noise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간과 방향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더 크고 깊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생성되는 노이즈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Noise between humans has specific features.
맞아요, 인간이니까요.
이기와 이타의 차원이 아니다.
This is not about being selfish or altruistic.
침잠하기 시작하면 이런 것들을 생각할 틈조차 없을 겁니다.
드러내고자 와 드러내지고자 혹은 알리고자 와 알려지고자의 간극에 있다.
This happens within the minds of individuals as they attempt to reveal, be revealed, inform, or be informed.
눈치채지 못하도록 어디엔가 흔적을 만들어 두고 마냥 기다리는 안타까움, 그냥 말해버릴까 갈등하며 누르고 있는 마음의 틈을 읽습니다.
그것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포착되는 것이 아닌 이후의 잔상에서 얼핏 비친다.
It arises from the afterimage, not being immediately sensed where it occurs.
잔상이라는 표현에서 가슴이 철렁합니다. 다 들켜버렸구나. 일어나는 그 순간에는 포커페이스, 세상에! 제가 손들고 맙니다. 그냥 따라가기로 해요.
그래서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Therefore, it seems to be non-existent.
극도로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으면 감지할 수 있지만 보통은 드러나지 않아요.
갈등과는 구분된다.
갈등은 상호적이나 관계 노이즈는 그렇지 않다.
Unlike conflicts, relationship noise is not mutual.
갈등은 표면적이고 시끄럽지만 관계 노이즈는 자기 자신 안의 비명입니다.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졌는데도 말이죠. 어떻게 이런 사유가 가능한지요.
한 곳에 치중하거나 집단적으로 용인된다.
It adheres to a point or is accepted within a group.
이런 내적 심리는 집착에 가깝지만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요.
이를 두고 시간을 보내며 반복되면 정서가 되고 문화로 이어진다.
Persisting over time, it develops into sentiments that lead to culture.
질끈 눈 감고 인내하다 보면 그 시간들이 정서로 자리 잡아 그 자신만의 문화가 되는 거겠죠.
그래서 문화는 일방적으로 옳지도 않고 이상적일 수도 없다.
문화 또한 관계에서 형성된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Hence, culture is not unilaterally correct or ideal as it is also noise from relationships.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어요. 문화가 개인적인 수준에서 재정의 됩니다. 노이즈의 원인인 타자는 아랑곳없이 자신 안에 안착해 버린 노이즈입니다.
이는 바람 같아서 느껴지지만 가시화가 어렵다.
Similar to the wind, it is felt but challenging to make visible.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오는 거구나.
바람 자체보다는 흔들리는 꽃잎으로 감지할 뿐이다.
It is perceived through a trembling petal, not directly by the wind itself.
이전 문장의 아름다운 재비유에 눈물 날 뻔했습니다. 꽃잎이 흔들리면 거기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 꽃잎이 알려주지. 또한 관계의 노이즈가 흔들림으로 표상화되고 있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이즈를 인정합니다. 슬픈 것만은 아니란 것을.
낯선 관계일수록 이에 관대하거나 날카롭다.
It can either be generous or harsh in unfamiliar relationships.
그럴 수 있어 라거나 하나도 모르면서로 귀결되는 관대와 날카로움입니다. 타자를 건조하게 객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건 그럴 수 없음의 관점이 구 할이다.
What can be done represents 90% of what cannot be done.
안된다는 거구나. 가슴이 너무 저려서 손을 놓게 됩니다. 알겠어요.
논리적용과 이해수용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We find ourselves caught between logic and sensibility.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생각, 또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은 지향점이 아니다.
Right or wrong is not what we are seeking.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 상태니까요. 판단 불가의 진실이 드러나는 상태 말입니다.
칼자루를 잡고 싶은 것보다 쥐어주고 싶지 않음이 크다.
We are more inclined not to relinquish the lead than to take it.
끌어당기는 건 노노, 그런데 끌려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서 있을 수도 없는데...
관계 노이즈는 인간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Noise in relationships represents both a human limitation and a possibility simultaneously.
한계라고 인정하지만 가능하다고 할 수 없어요. 가능한데 결국 불가능하니까 한계잖아요.
취하자니 성글고 피하자니 불가피하다.
Embracing the noise is immature, and avoiding it becomes indispensable.
다시 정리해 주시는군요. 취할 수도 없고 피해야 하는데, 그걸 아는데 피하기 싫은 거예요.
매번 마주한 후 그 자리에 둔 채 헤어진다.
We confront it and depart each time, leaving it where it belongs.
항상 거리를 둡니다. 그래도 거기에 있으니 다행인 건가요.
미안하면서 서운하다.
Sorrowful and bitter
원작의 미안은 제게는 슬픔이어서 제 감성대로 이어봅니다.
석연치 않은 채로 당기고 미덥지 않으면서 건넨다.
Uncertain in pulling it and untrustworthy in handing it
끌어당기면서 건네면서 주저주저합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마주 보고 한바탕 크게 웃으면 사라질 줄 알았다.
I used to believe it would dissipate amidst hearty laughter while facing each other.
그렇게 믿었었는데, 생각했었는데, 큰 헛웃음 안에 감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표면의 먼지만 날아가고 뼈대는 고스란히 앙상하다.
The bones continue to be bare, allowing the surface dust to scatter.
여전히 거기 그대로 더 춥고 외롭게 남아 있군요.
나와 타자 사이에는 반드시 노이즈가 일어난다.
Noise indeed occurs between the other and me.
이제는 모두 인정하겠습니다. 반드시 노이즈가 일어납니다.
문 아래 해처럼 어쩔 수 없다.
I cannot avoid it like the sun under the gate.
문 밑에 가까이 늘어진 햇빛처럼 제가 어쩌지 못해요. 제가 번역하다 패닉에 빠졌던 '문 아래 입처럼'에서 문을 bitten으로 하면 갑자기 너무 처절한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는 표현을 뺐어요. 작가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저의 한계입니다.
문 아래 해라 어찌할 수 없다.
We cannot help but accept it as the sun under the gate.
문 아래 드리워져 바라보는 해를 그저 인정하는 수밖에요. '문 아래 입이라'도 역시 같은 마음이었는데 '문 아래 해'로 수정해 주셨어요. 아, 정말 가슴 철렁하고 죄송했습니다. 무식과 무지를 슬쩍 덮어가고 싶었는데 조금 더 가득한 이해가 가능하도록 귀한 글을 바꿔주시다니요. (다시는 이런 민폐끼치는 무모한 짓 안 해야지 혼자 다짐합니다.)
I에 대척하는 타자를 We에 가두었습니다. 제3의 타자로 남기기 싫어서 제 마음대로 넣었습니다.
사람도 허공도 세월도 모두 노이즈를 낳고 기르고 어쩌지 못하다가
Humans, emptiness, and time all carry and amplify noise.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네요, 어쩔 수 없다 하시는 말씀에.
그것에 둘러싸여 고통받다가 그것이 전부였음을 끝내 인정하고 만다.
I eventually surrender to it by acknowledging that it encompasses everything after enduring torment.
고이고이 수긍하고 맙니다. 고통에 바라만 보아도, 닿지 않는 곳에서 주변을 맴돌아도, 그렇구나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노이즈가 한켠으로는 외로움으로 한켠으로는 고독으로 안내해주기도 한다.
Noise either leads us to loneliness or solitude.
외로워도 고독해도 그대로 자신을 바라봐주어야 해요.
두 개로 난 철로의 한쪽 위를 아슬아슬 걸으면서 철로 쪽으로 삐쭉 나온 돌들을 발로 걷어차며 걸었습니다. 저쪽 편 철로로 훌쩍 넘어갈 수 없는 그 경계, 간극을 인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인생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 막돼먹은 번역행동학 개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계 노이즈 by 이숲오
Noise in Relationships by @이숲오 eSOOPo
모든 관계에는 노이즈가 발생한다.
Noise occurs in every relationship.
자동차소리도 내연기관에서보다 타이어가 노면에 마찰해 나는 소음이 더 크다.
The noise produced by a car skidding on the street is louder than the interior noise.
개개인의 목소리보다 상호 간의 심리가 더 요란하다.
Mutual psychology is often noisier than individual voices.
잡음은 사운드에 국한되지 않는다.
Noise is not limited to sounds.
인간 사이에서 생성되는 노이즈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Noise between humans has specific features.
이기와 이타의 차원이 아니다.
This is not about being selfish or altruistic.
드러내고자 와 드러내지고자 혹은 알리고자 와 알려지고자의 간극에 있다.
This happens within the minds of individuals as they attempt to reveal, be revealed, inform, or be informed.
그것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포착되는 것이 아닌 이후의 잔상에서 얼핏 비친다.
It arises from the afterimage, not being immediately sensed where it occurs.
그래서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Therefore, it seems to be non-existent.
갈등과는 구분된다.
갈등은 상호적이나 관계 노이즈는 그렇지 않다.
Unlike conflicts, relationship noise is not mutual.
한 곳에 치중하거나 집단적으로 용인된다.
It adheres to a point or is accepted within a group.
이를 두고 시간을 보내며 반복되면 정서가 되고 문화로 이어진다.
Persisting over time, it develops into sentiments that lead to culture.
그래서 문화는 일방적으로 옳지도 않고 이상적일 수도 없다.
문화 또한 관계에서 형성된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Hence, culture is not unilaterally correct or ideal as it is also noise from relationships.
이는 바람 같아서 느껴지지만 가시화가 어렵다.
Similar to the wind, it is felt but challenging to make visible.
바람 자체보다는 흔들리는 꽃잎으로 감지할 뿐이다.
It is perceived through a trembling petal, not directly by the wind itself.
낯선 관계일수록 이에 관대하거나 날카롭다.
It can either be generous or harsh in unfamiliar relationships.
그럴 수도 있다는 건 그럴 수 없음의 관점이 구 할이다.
What can be done represents 90% of what cannot be done.
논리적용과 이해수용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We find ourselves caught between logic and sensibility.
옳고 그름은 지향점이 아니다.
Right or wrong is not what we are seeking.
칼자루를 잡고 싶은 것보다 쥐어주고 싶지 않음이 크다.
We are more inclined not to relinquish the lead than to take it.
관계 노이즈는 인간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Noise in relationships represents both a human limitation and a possibility simultaneously.
취하자니 성글고 피하자니 불가피하다.
Embracing the noise is immature, and avoiding it becomes indispensable.
매번 마주한 후 그 자리에 둔 채 헤어진다.
We confront it and depart each time, leaving it where it belongs.
미안하면서 서운하다.
Sorrowful and bitter
석연치 않은 채로 당기고 미덥지 않으면서 건넨다.
Uncertain in pulling it and untrustworthy in handing it
마주 보고 한바탕 크게 웃으면 사라질 줄 알았다.
I used to believe it would dissipate amidst hearty laughter while facing each other.
표면의 먼지만 날아가고 뼈대는 고스란히 앙상하다.
The bones continue to be bare, allowing the surface dust to scatter.
나와 타자 사이에는 반드시 노이즈가 일어난다.
Noise indeed occurs between the other and me.
문 아래 해처럼 어쩔 수 없다.
I cannot avoid it like the sun under the gate.
문 아래 해라 어찌할 수 없다.
We cannot help but accept it as the sun under the gate.
사람도 허공도 세월도 모두 노이즈를 낳고 기르고 어쩌지 못하다가
Humans, emptiness, and time all carry and amplify noise.
그것에 둘러싸여 고통받다가 그것이 전부였음을 끝내 인정하고 만다.
I eventually surrender to it by acknowledging that it encompasses everything after enduring torment.
노이즈가 한켠으로는 외로움으로 한켠으로는 고독으로 안내해주기도 한다.
Noise either leads us to loneliness or solitude.
노이즈를 인정하며 굳게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