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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보다 더 높이

[책] 김준희 소설집, 2025, 출판사 결

by 희수공원

오랜만에 다 읽은 책을 끌어안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폭풍우와 비바람으로 초토화되는 것 같은 엉킨 시간을 김준희의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풀어주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로 했다가 다시 일어선다. 그런 힘을 주는 책이다. 용암같이 끓어오르는 까만 속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여전히 그 지점을 다시 더듬으며 읽는다.



오늘은 다시 정오의 그 없음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메이는 시간들, 나를 찾으려는 안간힘에 보이지 않는 눈물을 뚝뚝 손바닥에 받아 낸다.


그녀가 안은 나를 같이 토해내며 모서리를 갈아 낸 나를 가만히 앉힌다. 그대로 괜찮아. 그 탕비실의 구석에서 부피를 채우며 머뭇거렸던 오래전 나를 다시 마주하면서 같이 위로하게 되는 경이를 만난다.


당신은 여전히 거기 있는가. 이제 문을 열고 나와도 좋다고, 보이지 않는 등을 다독거린다.


해설을 한 문학평론가는 '허구를 빌미로 비현실적으로 과감해지려는 방탕한 객기'가 없다며 추천한다. 허구를 뜯어다 방탕한 글을 종종 내지르는 나의 객기가 부끄러워 소리 없이 끝까지 그렁그렁 읽은 책이기도 하다. 어떤 커다란 심리적 자극을 주거나 소름 끼치는 반전의 흥분은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오랜 울림이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렇게 사는 것이다.


내가 변화에 골몰하는 사이에, 내가 자극에 갈증 나 하던 그 시간에, 흥분을 놓지 못해 쥔 주먹을 덜덜 떨고 있을 때, 김준희의 이야기는 나의 변화를 사뿐히 밟고 갈증을 다독이면서 떨고 있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렇게 나를 깊이 마주하는 시간들을.


이야기 속 하나하나의 순간들, 죽은 형을 지나 슬라임의 끈적함을 느끼다가 가끔은 무심하게 마주하던 내 엄마의 등을 꼭 안아주고 이내 걷는다. 그 길에서 가슴을 활짝 연 아이에게 다가오는 파도를 응시하며 응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살아낼 것이다. 서로를 닿기 위해 내미는 손끝이 바로 앞에 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서재에 들러 마음을 흔들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꽂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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