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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미나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1968년 부산 세미나

by 희수공원

그 해 4월 팬클럽 주최 문학 세미나 발표에서 김수영은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를 알린다. 그의 원고는 몇 줄을 읽고 나면 다시 그 줄 전 단락으로 돌아와 다시 읽으며 곱씹게 된다.


그 당시도 팬클럽의 힘이 꽤 강했나 보다 하는 추측과 상상에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공통으로 관통하는 사회 현상을 느끼게 되고 그곳에서 시대를 촘촘히 읽어 나가려는 시인의 힘을 엿볼 수 있어서 든든한 감동이 일었다. 그의 시대와 현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서 인간의 한계에 대한 시간을 둔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은 혹은 독자들은 자칫, 수십 년 전에는 그만큼 낡은 세대와 철 지나 가벼워진 고뇌였을 거라는 가볍고 천박한 결론에 다다르기 쉬운데 김수영의 발표 현장을 상상하다 보면 차오르는 생명력과 꿈틀거리는 생동감에 자세를 바로 고치게 된다. 금도 통하는 여전한 진리의 시론이며 철학이다.


김수영은 시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명확하지 않으나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팬들의 눈과 귀를 연다. 이 무슨 모호함이란 말인가. 그 또한 모호하다 말하면서도 정신의 가장 꼭대기의 사유라는 걸 밝힌다. 사실 다소 오만스럽게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찰에서 형식을 예술성에 내용을 현실성에 두어야 한다 주장한다. 20여 년간 시를 쓰면서도 여전히 '시를 쓴다'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쓰게 된다'며 시를 쓰기 전까지의 모든 언어와 그 당시의 상황을 모두 파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가장 순수한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바로 '그' 시여야 한다는 말이리라.


특히 열 번은 족히 되풀이하며 읽은 곳은 시를 쓰는 것은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온몸'이란 단순히 보이는 실체로서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쓸 때의 모든 기운과 쏟은 시어의 필연적인 선택일 때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곧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김수영에게 경의를 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더 나아지고자 갈등하는 순간, 혼란의 후면을 들여다보며 이상적인 자유를 상상하는 공간에 대한 깊은 사유가 거기에 있었다..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호칭을 분에 넘친다고 했던 걸 보면 혼란과 안정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그 최종적인 목표인 '자유'를 이루고자 또는 보고자 했던 그의 갈망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로움, ' 또는 경이로움의 경험을 갈구하면서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는 시 내용의 외침'이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시의 형식'을 정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일치되어야 하는 시에 대해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레이브스를 인용하며 서방 자유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인습적이며 순종하고 그로 인해 장래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노예제도라도 있으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종교, 정치, 지적으로는 하나 됨을 강조하지 않고 자유를 향해 가는 동안의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짓으로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담은 혼란과 혼돈은 반드시 싹터야만 하는 것이며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킨다'라고 하면서 시인들의 임무를 각인시키고 있다.


당신은 온몸을 밀고 나가는 시인인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무엇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지만 결국 본질을 실현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가. 김수영은 그 '온몸'울 위한 순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시작하라 한다. 그 혼돈을. 아무도 하지 못한 그 말을 하라 한다. 헛되이 보이나 결국 참이 되는 그 말을.



참고: 김수영, 디 에센셜, 2024년 8월 2판 3쇄, 민음사, p.380~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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