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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구원을 위한

by 희수공원

어떤 욕망에는 에너지가 제로였으면 좋겠다. 그게 전혀 가능하지 않음을 이미 그 '욕망'이라는 단어로부터 새어나가는 의지를 맞으며 탄식한다. 원래부터 거기에 그냥 있으면서 수시로 어느새 세상 구석으로 밀어낸다. 비어있고 싶지만 이성으로는 도저히 거부하지 못하는 그 힘이 두려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피하지 못할.


언제나 떠오르는 한 장면은 살인자가 방음실 한가운데 소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때로는 눈을 지그시 감고 클래식을 듣는 장면*이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의 스타바트 마테르 돌로로사(Stabat mater dolorosa),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을 맞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통을 표현한 애절한 음악이다.


의지를 잠재우고 고통의 확산을 제어하며 마치 구원받은 듯한 그런 순간을 맞을 때가 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스토리로 살인자가 향하는 구원의 길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그것 때문에 살인을 해야 하는 그 엄청난 전율의 추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장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열망을 위해 세상을 등지고야 마는 그 욕망이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이해한다, 그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경외스러운 그 상태를 말이다. 음악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그 시간들에 넓게 깊게 완벽하게 안주하고 싶은 열망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게는 쇼팽과 드뷔시와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와 죠시 그로반과 새라 브라이트만, 그리고 길을 걷다 문득 멈춰 듣는 이름 모를 음악들이 복잡한 마음을 내려두게 한다. 내 안에 나로서 깊이 가라앉아 마치 아무런 공간도 시간도 없는 것 같은 진공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안식처인 그 진공이 끝나면 세상을 다시 맞아야 한다.


그 여운을 안고 세상을 새롭게 보려 한다. 여전히 당황과 고통과 회한, 때로는 기쁨과 눈물과 희열의 잡탕밥 같은 곳을 첨벙이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구원의 길에 동의한다. 음악뿐 아니라 '글' 안에 들어있는 진심을 알아보며 또한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희열에 빠지기도 한다.


잠시 뿐인 것 같지만 그 '잠시들'을 이어보려는 그 의지를 그도 역시 알고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적인 교감과 관계성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서로를 공감하고 자신을 허물어 하나가 되는 길, 이기를 버리고 상대를 오롯이 향하는 그 마음 말이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랬다고 믿는다.


타인을 부정하고 타자의 마음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는 그 의지의 슬픈 에너지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던가. 글은 음악처럼 예술의 문을 여는 일이다. 거기에 자신을 담고 흔들어 비플랫 마이너로 상대로 이어지는 글을 두드리는 것이다. 마주 보며 통할 때 그간 겪어왔던 고통을 벗어나는 순간을 맛보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 같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흔적들이 여전히 계속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힘을 준다. 맹목의 의지에 쓸려 나올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이다.


내 진심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는 슬픈 의지에 맞서고 있다.



*: 영화, 파괴된 사나이 by 우민호 감독, 2010 감독,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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