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그 연대의 서사

[책] '할매' by 황석영, 창비, 2025

by 희수공원

최선을 다해 자연의 순리가 배인 곳에서 이치에 따라 살다가 스스로를 자연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우연히 태어나 자연의 선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다. 살아내고 마침내 돌아가는 길, 작지만 깊이 품었던 그 길에 생명의 씨앗이 든다.


다시 자연의 빛으로 살아나는 아름다운 순환의 삶, 그 개똥지빠귀의 날개가 가리키는 그곳에서 가라앉았던 꿈을 다시 새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새 한 마리의 뱃속에 남겨진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여린 풀이 육백 년의 팽나무가 되기까지의 여정에는 자연과 이어지는 경이로운 서사가 촘촘하다.


겨울이 '오래 사는 나무의 죽음 같은 정지 기간 (p,37)'으로 겨울순의 강인한 생명을 품은 침묵의 기간을 지나도록 하기 때문에 그 어느 계절보다 특별하다는 부분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빠르게 달려야만 하고 기간은 줄여야만 하며 공간 사용도 인간 사용도 효율의 극대화를 외치며 시간에 머물 줄 모르는 세상이 서늘하다.


개똥지빠귀의 기억이 새겨진 나무의 테도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간 몽각도 삶의 갈증과 고단함을 부단히 견디었을 것이다. 생명이 날아들어 거쳐가는 영겁의 자연 속에서, 혼을 다해 살고 가는 하루살이의 수컷과 암컷이 자연의 이자가 될 때 하루살이의 숭고한 그 하루 중 어느 때쯤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는지 숙연해진다.


수백 년 그 자리를 지키는 팽나무 그늘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까이 갯벌의 삶의 소리가 생생하고, 굿판의 경문이 사람들의 혼과 시간을 연결하며 가슴에 새겨지고,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들이 천주교와 동학의 박해와 순교를 거치며 견고하게 남았다.


지금 우리는 땅과 그 아래위의 생명을, 나무와 갯벌과 공기와 바다와 개똥지빠귀와 하루살이와 도요새와 그 새끼들과 애벌레까지 모두 한꺼번에 몰아넣어 갈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분명 인간의 미래도 들어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인간에 대한 독설이 모두 사실인 것 같아 두렵다.




한라산을 오를 때마다 하얗게 생명을 잃은 구상나무를 마주한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줄 아는 등산객들의 사진 배경은 인간이 초래하고 있는 죽음의 인증샷이다. 모두의 책임인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 속담이 있듯이.


인간은 눈앞의 자기 이익이 걸려야 움직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의 90%는 존재 가치가 없이 단지 배경을 채우는 용도인 걸까.


자연을 다 뜯어먹으며 썩고 곪은 구덩이에서 말라죽어가고 있다. 수십 년 전 어느 노작가가 인간이 자연의 이자를 먹고살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던 그 말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인류애적 공동의 노력이란 말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를 제대로 하는 리더들을 만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아직까지는.


▣ 나무 사진: 한라산 구상나무 20251114



▣ 소설을 한자리에서 한 번에 읽었던 기억이 오래다. 오랜만에 뜨거웠던 몇 시간을 작가의 말 그대로 기억하려고 한다. 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깊고 아름다운 도래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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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하는 봄의 성장과 여름의 번성에서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한해의 끝인 겨울이 사계절 중에 특별한 것은, 오래 사는 나무에게도 죽음 같은 정지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 p.37
나무는 씨앗이었을 적에 개똥지빠귀의 뱃속에 있다가 땅속에 함께 묻혀, 그것의 몸속에서 싹이 트고 움이 솟아올라 풀 같은 묘목으로 시작한 기억이 그해에 자라난 만큼 나무껍질의 한 층으로 나무의 제일 안쪽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기억들을 각각 다른 층을 형성했다. 팽나무의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겹겹의 층이었다. 그 매번의 겨울 층마다 개똥지빠귀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 p.46-7
할매, 이것이 당신 자식이라오. 내가 키웠어요. 몽각은 이 빈터의 오랜 주인이었던 고목에게 자기도 한 식구가 되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 p.78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이제 내가 먼저 없어지네. 그는 한때 그가 부지런히 잡아서 먹고 몸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들에게 자신을 보시하고자 했다. - p.83
우리가 선하게 살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는 귀천도 없고 위아래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서로를 섬기고 아끼며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 p.121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귀하고 빈천한 것과, 남녀노소와, 정처 소생과 첩 소생, 노비와 주인 같은 차별은 새 세상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 p.155
헤아릴 수 없는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합창이었다. 갯벌이 밤에는 거대한 노래밭인 거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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