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8월이란 생각이 든다면,
8월이 되면 마음이 조금은 다급 해지는 기분이 든다. 왜 벌써 8월이지? 올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는 기분으로 초조하게 달력을 살핀다. 8월을 기준으로 그렇게나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이란 계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풀 꺾이게 될 것이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많은 것들의 분위기도 바뀌게 되겠지. 그런 생각이 꼬리를 꼬리를 물다 보면 괜히 상반기를 순삭 당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왠지 억울해진다.
실제로 올해는 더욱이 코로나19가 재유행하며 거리두기가 상향되기도 했고, 우리의 일상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고 있지 않으니까. 나 또한 계속해서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생활 반경이 대폭 축소되었고 마주하는 사람들도, 환경도 좁아졌다. 제법 오래 재택 생활이 이어지며 이젠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비일상 같은 일상을 하루하루 보내는 기분이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준비한 후 컴퓨터를 켜고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 있는 재료로 집밥을 해 먹거나 그마저 질리는 날엔 배달을 시켜 먹고, 오후 업무를 하다 퇴근을 한 후엔 요가를 가거나 쉬었던 평일의 나날들. 월화수목금 중엔 어느 요일을 랜덤으로 딱 뽑아도 거기서 거기의 비슷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던 어느 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초 구입한 이 일기장은 조금은 특별했다. 매일 짧은 분량의 글을 쓰면 5년 치 기록이 모이게 되는 형식의 일기장이었다. 이 5년 일기장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작가님의 추천에 솔깃해져 구매했었다. 꾸준히 쓸 수 있을까 자신 없어 잠깐 구매를 망설였지만, 그래도 오랜 기록이 모일 언젠가를 기대하며 샀다.
정말 쓰기 힘들거나 까먹은 날도 꽤 있었음을 미리 고백하지만, 그래도 일기장의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자기 전에 한두 줄 끄적인 후 잠에 들었다. 도무지 쓸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날들이어도 연필을 들고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도 적어 갔다. 점심과 저녁에 먹은 것, 오늘 마신 커피의 맛, 끝장나게 더운 날씨 같은 시시한 것부터 그날의 기분과 몸상태를 적기도 했다. 가장 많이 적었던 것은 아마도 무얼 먹었느냐였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일 조금씩 쌓인 일기 덕에, 일기장은 어느덧 절반은 훨씬 넘은 분량이 채워졌다. 지나 온 기록들을 읽다 보니 그날의 잔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마도 당시엔 정말 사소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었는데, 써 두지 않았다면 까맣게 잊었을 일들도 다시금 생생하게 기억났다. 일이 바빠 후다닥 준비해 먹었던 점심 메뉴도, 반가운 비가 온 후 무지개가 떴던 어느 날의 날씨도, 특별한 뿌듯함이 있었던 어느 날의 기억도. 매일 쓰려 노력한 몇 줄의 기록 속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읽어 보면 비슷하더라도 똑같은 날은 없었던 사실이, 8월을 맞이하며 든든한 위로로 다가온다.
그래 시간이 좀 빠르게 가면 뭐 어때, 이렇게 매일을 조금씩은 다르게 보내고 있는데. 매일의 별 것 없음 사이에서 건져내는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라도, 나에게 쌓여 있기만 하다면. 그거면 되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
- 김지연, <사랑하는 일> 중
그렇다. 우리는 매일 달라지고 그 달라진 모습으로 매일 무언가를 사랑할 것이다. 그 자체로도 정말 멋진 일일 테지만. 그 멋진 일을 더욱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이라도 기록해 두는 일은, 별 것 없어 보이는 날들을 건져 올려 주는 유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