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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Jun 09. 2017

네가 있었기에 내가 있었지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아마도 이것이 질투나 증오 같은 감정에 대한 나의 반응이자 나름의 대응방식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릴라에게 느낀 종속감과 그 미묘한 매력을 이런 식으로 포장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녀가 제멋대로 구는 것도 함께 받아들이도록 나 자신을 훈련시켰다는 점이다.  

(53쪽)

 

그때 릴라는 언제나 이 문제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고 가끔은 신경질적이 되기까지 했다. 우리가 친해지고 난 뒤에도 '우리 이전'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나까지 불안해지곤 했다. '우리 이전'에는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길고 긴 시간이 있었다.

(39쪽)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29쪽)


가장 순수하기에 가장 잔인할 수도 있는 시절, 유년시절의 추억은 정말 눈부시기만 할까? 작품은 유년시절에 대한 암묵적인 환상을 제거한다. 현실적인 이야기는 기억 속 숨겨진 진짜 유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릴라'를 만나게 되면서 '레누'의 유년 시절은 릴라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서로는 모든 것이 두렵고 혼란스럽던 시기를 함께 경험하며 성장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친구에게서 찾아 따라 하거나 질투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없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자아가 형성되어가고 있어 가장 영향을 주고받기 쉬운 시기, 서로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각자의 존재를 천천히 자각해간다. 또래 집단에서 발생하는 묘한 경쟁심리와 열등감은 행동의 원동력이 된다. 레누에게는 릴라가 가진 특성이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그녀만의 무엇이다. 레누는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릴라와 같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감정에 휩싸인다.


릴라와 레누의 우정은 때로는 미움으로, 열등감이 가득 찬 질투로, 가슴 떨리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미묘한 감정들의 묘사가 탁월해서 미처 언어로 풀어내지 못했던, 내게도 있는 기억들을 소환한다. '맞아, 이런 기분이었어' 하며 레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다소 두꺼운 장편임에도 끝까지 읽고 싶어 지는 소설이다.


캐릭터 설정들도 마치 살아 있는 인물들처럼 통통 튄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시끌벅적하고 사고가 끊이지 않는 나폴리의 한 마을이 눈 앞에 떠오른다. 두 소녀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독자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눈을 잡는 이야기들 속에는 당시 아이들과 여성에게 어떤 일상적인 폭력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곤 했는지 또한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두 소녀의 삶이 어떻게 결을 달리하며 나아갈 것인지,

왜 릴라는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인지,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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