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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Jun 28. 2017

오래된 연인들이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57쪽)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139쪽)


5년째 연애를 하고 있던 K는 어느 날 남자 친구와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미 감정이 다했고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헤어지는 건 못하겠다고, 정말 못하겠다고 했다.


당시 그런 감정 또한 오래 만들어 온 사랑의 다른 모습이지 않겠냐는 말로 애써 위로했던 나는 나의 말의 무책임을 알지 못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런 생각으로 앞으로의 시간까지 망가트리지 말라고 하며 지금에야 읽은 이 소설이라도 함께 건네주었을 텐데.


프랑수아즈 사강은 권태를 느끼고 있는 한 커플과 새로운 열정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 세 인물들이 각자 자신들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관계를 유지하는지, 순간들의 감정 묘사가 탁월한 소설이다. 특히 오랜 연애를 하다 보면 느껴지는, 서로를 놓지 못하는 심리를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좋다.


로제는 서로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망가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이다. 그 자존심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 온 둘의 세계에 대한 애착에서 기인한다. 두 사람의 규칙이 존재하는, 규칙만이 지켜진다면 평온할 세계. 시간 쌓아 신뢰와 안정의 세계를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익숙함으로 서로를 붙잡아 둔 이들에게는 다시 권태와 외로움이 찾아올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들어가는 관성의 관계에 새로움을 더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중요한 대사이기도 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바로 시몽이 알려주는 중요한 연애의 기술 중 하나, 상대방의 취향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기뻐하는지 조차 잊고 살았던 폴에게 이 질문은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자신조차 무심해져 있던 나의 취향에 대한 관심은 외로운 상대방을 유혹하는 위험한 애정 표현이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그 모든 '어떤'이 포함된 질문들로 사랑은 시작되고 지속된다.


서로의 취향을 나누는 능력은 연애 관계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하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들에겐 자신이 구축하고 가꾸어가는 어떤 공간이 있다. 그런 공간이 확실히 구축되어 있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즐겁고, 특히 연애는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의 공간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타인의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을 때, 그곳은 암흑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공간에 불을 켜고 먼지를 털어내며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상대방도 서서히 생기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간을 알고자 하는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 그 관계는 함께 있어도 외로운 관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사강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서도 사랑에 대한 현실적이고 시니컬한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는 열정에 들뜬 사랑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쩌면 더 현실적이어서 씁쓸한 결말. 결국 폴은 어떤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권태와 외로움이라는 숙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라면, 방법은 하나다. 다시 무심함을 떨치고 각자의 공간에 관심을 가져 줄 의지를 갖는 것. 그런 의지로 함께 숙제를 해결할 서로가 되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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