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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ug 10. 2017

82년생 김지영의 삶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정면으로 바라 본 김지영 씨의 삶


『82년생 김지영』이 충격적으로 좋은 소설인 이유는, 다루는 주제도 주제지만 그 주제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다. 그동안 유사한 주제를 은근하게 녹여내고 드러낸 작품들은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똑바로 마주 봐준 적은 이때까지 없었다. 결코 단단한 결심 없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집필 초기부터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는지 궁금했다.

-      “네, 처음부터 정면을 생각했어요. 2015년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접하고 이제 그래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거든요. 전에는 혼자만 생각하고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제 겉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어요. 말하고 연대하는 게 가능해졌어요. 제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쓴다 해도 심한 거부반응이 돌아온다거나, ‘이렇게 말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라고 하지 않을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판단했어요.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적인 은유 없는, 어쩌면 대놓고 멋없게 말하는 소설 인지도 몰라요. 멋있게, 아름답게 쓰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전하고 싶었어요.”

 (릿터 4/5호, 조남주 작가 인터뷰, 정세랑 글)


시사 프로그램 방송 작가였던 경력의 영향으로 데이터와 보도 자료에 익숙하다는 조남주 작가는 소설도 실제 데이터를 활용해 쓴다고 한다. 소설 속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경우에도 통계적 자료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예컨대 주인공의 이름인 ‘김지영’은 82년도 출생 여아의 이름 중 가장 많은 이름이다.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세대, 그래서 여성의 이름에도 '지(知)'라는 한자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소설엔 실제 사건들의 관련 기사들이 각주로 달려있기도 하다.


초반엔 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론 이런 장치들로 인해 주인공에게 특별한 감정 이입이 다소 힘들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때문에 소설 속 사건들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보편성을 가져야만 했다.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고, 책을 덮은 독자들은 ‘나도 XX년생 김지영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신기했다. 몇몇 기사들과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창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은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처럼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했던 걱정과는 달리 빠르게 그녀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었다. 김지영의 경험들 중 몇 가지는 나 또한 언젠가 경험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뻔하고, 흔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 독자들에게는 흔한 경험들이 그저 누군가에겐 놀랍거나, 혹은 과잉 재현되었다고 느껴질 수 있을 거란 사실에 슬펐다.


아마 나를 포함한 여성 독자들은 분명 복잡한 차이점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김지영에게로부터 자신을 발견했던 것 같다. 이는 어쩌면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차이들, 그 요소들 자체가 여성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음(혹은 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교육적 차이를 비롯하여 개인의 성향, 외모 등 그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문제는 현재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과도 연결된다.



새로운 이름들을 상상하며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강남역 살인사건을 떠올려 보자. 강남역 살인사건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여성 혐오범죄’라는 인식을 수면 위로 올려 준 데에는 사건의 보편성이 큰 역할을 했다. ‘강남역’과 ‘공중 화장실’이라는 장소의 보편성이 많은 이들의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만일 이 사건이 비싼 호텔에서만 벌어졌어도 사건의 해석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을 수 있겠다.) ‘보편성’이 모을 수 있는 힘이었다. 사건 이후 눈을 뜬 다수의 여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던 일상적 혐오와 특정한 혐오, 그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나옴을 인식했다. 그렇게 우리는 '혐오들'에 민감해질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 이전에도 존재했던 수많은 여성 살해 사건들은 다소 특수한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범죄의 잔혹성이나 가해자의 정신 상태(정신분열증이나 사이코패스), 피해자의 직업(성매매종사자) 등이 회자되거나 그에 집중된 보도들이 대다수였다. 마찬가지로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에도 혐오범죄라는 여론 반대편엔 가해자의 정신 상태에 집중한 만만치 않은 여론이 있었다. 여성 혐오를 부정하기 위해 또 다른 소수자 혐오에 기댔던 셈인데,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혐오의 문제들이 하나의 단순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때문에 보편성이 촉발시킨 공감과 분노는 당연히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지만, 그 이후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는 복잡한 혐오 문제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유의해야 한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견고한 괴물들 앞에서 대체 이런 고민들을 왜 하고 앉아 있어야 하나 억울함이 치밀 때도 많지만, 그 괴물들과 오래 싸우려면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김지영의 보편적 삶이 불러일으킨 엄청난 공감의 힘이 어떤 감정들을 모았다면, 이제 그 감정들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수많은 이름들과 그 이름들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을 상상하는 데 써보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해야만 우리는 오래 버티며 새로운 김지영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앞서 말했지만 다양한 정체성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지정 성별로 인해 겪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런 건 없다고 빼액-하는 말 안 통하는 괴물이 이 과정을 겪지 않고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남성 독자들이 만일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김지영 씨의 일대기를 그저 묵묵히 읽어주고 본인은 몰랐던 경험들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나의 경우엔 10년 뒤 태어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공감되는 것들이 무척 많았다. 더불어 어떤 면으로는 김지영 씨의 삶엔 꽤 괜찮은 이들이 함께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 평균 이상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여성의 일생이 비극으로 다가온다는 것 때문에 씁쓸함은 더 컸다.



"난 선생님 되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왜 집 떠나 그 먼 대학에 가야 해?"
"멀리 생각해.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선생님만 한 게 어떤 건데?"
"일찍 끝나지, 방학 있지, 휴직하기 쉽지.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 거야?"

(71쪽)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93쪽)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이제껏 더 심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세워 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딱, 하고 단단한 돌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105쪽)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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