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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Oct 26. 2016

과거의 내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순간

과거를 곱씹으며 천천히 성장하는 방법

아침을 나설 때 손끝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새삼 차가워진 것을 느낀다. 계절이 변하고 있는 느낌,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순간이 오면 그 어느 계절보다도 아쉬운 마음이 더한다. 이렇게 또 한 해가 내 뒤로 쌓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특히나 과거를 자주 곱씹는 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색색의 볼펜들로 앞으로의 일을 계획할법한 열다섯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그때에도 난 연말이 되어가면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는 일을 하기보다 지난 일들을 정리했다. 내 뒤로 쌓인 3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계절별로 그 당시에 어떤 큰 일들이 있었는지 정리했던 것 같다. 200x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쓰고 그 밑엔 200x+1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쓰고 이런 방식으로. 지금 떠올려보면 귀엽지만 그때의 나는 꽤나 심각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올 시간들보다 과거의 시간들을 헤아리는 일.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난 그 일이 참 중요한 일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별 것도 아닌 기록들이었음에도 부끄러워 버리고 싶었던 그 자의식은 어디서 왔던 건지

그러고는 작년에 쓴 다이어리를 꺼내 읽었다. 바로 작년에 쓴 것인데도 부끄러울만치 유치하다고 느꼈고 그걸 버리기도 했다. 물건 따위를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인 나로선 굉장히 파격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을까 싶다. 굳이 안 읽으면 되는데도 책상 서랍에 그 글들이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었겠지. 지금은 거리에 쓰레기통 찾기가 어려운데 그때만 해도 거리 곳곳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혹여나 누가 볼까 그 공공 쓰레기통 깊숙이 다이어리를 버리고 온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일은 한동안은 해마다 지속되었다.


위의 두 가지 행동은 생각해보면 참 모순되어있다. 굳이 과거를 기억한답시고 온갖 기억력을 동원해 기억 리스트를 만드는 일, 그리고 굳이 과거를 헤집고는 스스로 그것을 버리려 했던 일. 그런데 왜인지 작년에 쓴 다이어리를 보고 유치하고 허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순간, 조금 허무했고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가 과거에 해온 업적(?)들을 들춰내면서 현재의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확인해보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지난날의 기록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점차 두렵기까지 했다. '나 이제 성장 멈춘 거야...?' 같은 심정이었달까. 어쩌면 작년의 일기장을 갖다 버릴 정도의 나는 그만큼 폭풍성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지난 학기 쓴 과제를 보고 이거 진짜 내가 쓴 거 맞아?(지금 쓰라면 못 쓸 것 같아서)라고 느끼는 지금의 나 또한 성장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숱하게 버려온 과거들 덕분에 어떤 해의 기록부터는 고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폭풍성장의 시기는 지났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종종 나아지는 게 없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이제야 나는 기록으로 남겨진 많은 순간의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기록으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조금 더 나은 현재의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옆엔 함께 미래를 꿈꾸자고 손잡아 주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의 현재와 미래가 더 나아질 수 있게, 이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과거가 될 현재들을 진중하고 충실하게 살아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몇 년 후의 내가 2016년의 이 계절을 떠올릴 때에는 부끄럽기보다 뿌듯한 마음이 더 들 수 있겠지. 그렇게 되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몇 년 후의 나를 위해 이 계절의 끝을 더 잘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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