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난처스러움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생각보다 일상적이다. 바로 화장실에 가야할 때. 간혹 선택지가 남녀 공용 화장실뿐이라면 되도록 가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야 할 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언제나 느낀다. 그 뿐일까, 들어가서도 수상한 나사 구멍은 없는지 살피고 이미 그런 구멍들을 막은 휴지들을 보아야 하는 일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쾌하고 찝찝한 것이다.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기분을 일상적으로 느껴야 하는 건, 나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젖게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 실체를 강하게 느끼고 목격한 시점은 바로 2016년에 발생한 강남역여성혐오 살인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나 또한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닌 ‘여성이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는 계기었다. 사건 이후 내게 여성주의 비평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접하는 일은 곧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건 때로 분노가 되기도 했고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는 여성을 타자화하고 희생시키면서 유지되었고, 그 산물로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거나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희미해진 목소리들은 애써 또렷이 듣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변두리에 머물러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일부러 찾아 보는 일. 그건 지금 나의 목소리를 확장시키는 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발견하고 몇 장을 들춰 보고 나니, 소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의 저자 김은주는 철학사에 없던 여성의 자리에 주목한다.
철학의 역사는 오랫동안 남성들만의 것이었다.
철학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보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생각하는 여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미쳤거나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남성을 유혹하는 악녀였다. ‘남자를 이겨 먹으려는’ 이런 여자들은 ‘여자답지’않은, 희한한 존재로 여겨졌다.
<들어가며 : 문턱 너머 저편> 중
긴 역사 동안 여성을 배제한 채 보편적 인간을 이야기 해온 서양 철학사 속에서 타자로서의 여성이 철학적 사유를 하는 것은 남성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때문에 여성 철학자들을 따로 묶어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 바라보는 일은 지금 이 순간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하다. 게다가 저자가 밝히듯 이 책은 여성주의 철학에 착목하기보다는, 사유하는 여성 그들 자신을 다룬다.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J.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 총 6명의 여성 학자들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다루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적 사유 과정과 결과를 요약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장점이다. 본격적으로 이들의 철학서를 접하기 전, 입문서로 읽기에도 좋을 정도의 난이도로 쓰여진 것도 좋다. 게다가 저자의 단정한 문장력은 철학적 사유가 단지 공부의 대상만이 아니라 음미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이를 깊이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대신해 아파하고 기꺼이 안길 원하게 된다. 보편을 사고하는 철학자가 인간 모두에게 드리운 고통을 직접 체험하려 할 때,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불행에 뛰어든다. (124쪽)
중력으로 끌어당겨져 납작해지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 해를 끼침으로서 무엇을 얻는가? 바로 자신이 커진듯한 느낌, 자신이 넓어진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을 해쳐 그의 내부에 빈자리를 만듦으로써 자기 마음속 빈자리를 메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력의 법칙과 고통의 악순환이 제도에서 관계에 이르기까지 순환한다고 베유는 설명한다. (137쪽)
<시몬 베유> 중
마지막으로 이런 책을 읽는 것이 내게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용기 있게 삶을 개척해 간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이 나도 더 또렷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은 느낌에 있다.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그들의 존재는 내게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일상적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고 더 또렷이 생존하기 위하여 버틸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아마 나에게만 국한된 두려움이 아닐 것이므로, 더 많은 여성들이 이 책을 읽어서 우리가 함께 두려움에 지지 않기를 바란다.
“너 메갈 하냐?” 이 한마디로 알 수 있듯, 한국 사회의 민낯은 저항하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이제는 저항하는 여성을 그저 익명의 메갈리아로 명명하려는 가부장제의 거울을 깨고, 부서진 조각들이 비춘 다양한 차이를 통해서 다른 세계로 가는 전망을 갖고 활동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닫는 글 : 거울을 깨고 다른 세계로> 중
- ‘너 메갈이냐?’는 바보같은 질문에 지치신 분들께
- 여성주의 철학에 관심이 생겼는데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할지 막막한 분들께
- 지적인 욕구를 채우고 싶은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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