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블랙 스완>
전 완벽했어요.
결국 그녀는 죽었다. 왕자의 진실한 사랑만이 백조에 갇힌 ‘순결한 소녀’의 마법을 풀어줄 수 있었지만. 흑조의 유혹에 넘어간 그녀의 왕자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절망한 백조는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두렵고 연약하고 불안했던 소녀는 절벽에서 떨어짐으로써, 자기를 옭아매고 있던 틀을 깨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백조를 옭아맸던 그 틀은 무엇이었을까.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여왕백조를 연기했던 ‘니나’(나탈리 포트만).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누군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온 힘을 다해 떨어진 그녀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그제야 니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난 완벽했어.
그래, 넌 아름답고 두렵고 연약해. 네가 춤을 출 때마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해내려는 강박은 봤지만 자신을 풀어주는 건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 모든 규율들이 뭘 위한 거지? 완벽함이란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야.
니나는 <백조의 호수> 발레공연의 주연배우로 발탁되어 완벽한 연기를 소화해내는 달콤한 꿈을 꾼다. 웅장한 음악에 맞추어 까치발을 총총거리며 날갯짓하는 가냘픈 백조 한 마리. 위태롭다. 하지만 아름답다. 화면을 수놓는 니나의 우아한 발레 를 보면서 관객들이 느끼는 이중감정이 아닐까 싶다.
니나의 우아함 아래에는 물에 뜨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리의 발처럼 찢기고 상처 난 발이 꼿꼿이 버티고 있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그런 니나의 발을 비추며, 관객들의 불안한 심리 역시 자극한다. 기형적으로 꺾여있는 꽉 막히는 발레슈즈, 그 속에 구겨 넣어진 피가 나고 상처난 발,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한 쪽 다리, 바닥과 수직으로 서 있는 나머지 한 쪽 다리, 그 가장 아래에 오로지 발끝으로만 모든 것을 지탱하는 허공의 발. 금방이라도 기울어져 쓰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포착하는 카메라 워킹은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까지도 잘 반영하고 있다. 통제 속에서 만들어진 발레의 아름다움은,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억압된 니나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며, 그녀가 느끼는 불안함 역시 발끝의 위태로움과 많이 닮아있어 관객들은 시각화된 긴장감을 느껴볼 수 있다.
‘발레’라는 소재 역시 불안함과 아름다움의 공존을 시각화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발레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의 산물이다. 발레는 꺾이고 뒤틀린 발을 총총거리며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억압 속에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해 낸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인간의 손길이 많이 닿은 것들을 ‘고상함’이라고 칭하며, 비극의 주인공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으로 내세웠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내면 깊숙이 묻어두고, 우아함이라는 틀 안에 통제되어 기형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발레’는,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고상한 모방행동임에 틀림없다.
니나는 발레의 고상함과 너무도 잘 맞는다. 그녀는 인간다움이 지나치게 통제되어진 인형과 같다. 니나는 우아한 백조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모든 자연스러운 본성들은 무시한 채 오로지 ‘고상함’을 좇는다. 스위치만 감으면 음악에 맞춰 회전하는 오르골의 예쁜 소녀처럼. 발레슈즈에 갇혀있는 발에 상처가 생겼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감정이 억압된 그녀는 아픔에 대한 감각 역시 무뎌진 듯하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워, 니나.
앞서 <시학>의 관점에서 니나는 완벽하게 고상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완벽한 그녀는 오로지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전혀 완벽하지 않다. 니나는 ‘완벽함을 향한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지경에까지 간다. 자신의 완벽하지 않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아 불안한 니나는, 점점 그 공포가 커지고 결국 미쳐버린다.
그녀가 보이는 강한 ‘히스테리’ 증세는 그녀가 받는 억압과도 연결이 된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Hystera(자궁)’로, 고대 이집트 의학에 “자궁의 굶주림”이라고 표현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어원 그대로 히스테리는 오랫동안 여성의 질병으로 여겨져 왔다. 플라톤은, 자궁은 출산을 갈망하는 “동물”로서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면 언짢아지고 욕구와 충동에 의해 두 성이 합쳐질 때 안정을 찾는다고 하였다. 즉, 만족되지 않은 자궁으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 ‘히스테리’이며, 의미를 더욱 확장하여 보면 히스테리는 여성의 성적 억압과 깊은 연관을 갖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인간의 모든 고통과 질병은 인간의 원죄의 탓이며 이 원죄는 죄 많은 여자의 유혹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라는 기독교적 사고관이 확산되자,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여성’이라는 성적 존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惡)’을 추방하고, ‘악(惡)’으로 간주되었던 여성의 성적 욕구와 충동은 완전히 억압되고 말살된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여성은 존재 자체가 부인되며 끊임없이 감춰지고 억압되어야만 했으며, 이러한 억압이 여성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히스테리 연구에서 주류를 이루어왔다.
니나 역시 억압을 받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데, 그녀에게서 마더 콤플렉스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니나가 <백조의 호수> 주연배우에 발탁된 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축하하기 위해 달콤한 케이크를 준비한다. 그러나 배가 아파서 먹지 못하겠다는 딸, 니나. 어머니는 자신의 성의를 거절한 딸에 대한 서운함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치며, 딸이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마음이 약해진 니나는 결국 아픔을 참고 케이크를 한 입 먹는다. 이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딸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발레리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니나의 어머니는 딸의 ‘소녀성’에 강하게 집착한다. 성인인 다 된 니나지만, 니나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소녀’에 머무르게 되는데 핑크빛 방, 유아틱한 인형들, 예쁜 소녀가 춤을 추는 오르골 등에 파묻혀 있는 니나는 언제나 예쁘고 착한 공주님이었다. 자신의 사적인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녀의 삶. 니나의 어머니는 매일 니나의 옷을 벗기고, 손톱을 잘라주는 등의 과잉보호를 넘어서 딸의 성문제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한다. 니나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 인형으로 박제된다.
내가 백조만 캐스팅한다면 백조는 네 거야.
하지만 백조만 캐스팅하진 않아. 이제 내게 흑조를 보여줘 봐, 니나.
니나의 하마르티아가 ‘강박증’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마르티아’ 란 비극에서의 비극적 결함을 의미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다루었던 ‘중대한 과실’과 일맥상통한다. 중대한 과실은 단순한 판단 착오나 사소한 실수 혹은 성격적 결함에서 발생한다. 니나는 완벽한 아름다움, 최고의 여왕백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강박증으로 점점 미쳐가며, 결국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흑조 ‘릴리’(밀라 쿠니스)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환상에 끊임없이 불안해하는데, 이는 하마르티아로 작용하여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흥미로운 점은 ‘히스테리’와 ‘강박증’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프로이드는 히스테리를 여성이 성적인 성숙을 하면서 미성숙한 남성성을 억압한 결과로 생기는 증상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에게는 리비도가 있는데 이는 남성성의 상징이며, 여성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우월한 남성성이 발현되지 못한 상태가 여성성이며, 여성은 여성이 되어가면서도 남성성을 떼어내기를 거부하고 그저 억압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자아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 프로이드의 이론은 히스테리가 ‘자아부재의 병’이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히스테리는 대개 자아의 결핍 상태에서 발생한다. 이와 반대로, ‘강박증’은 완전한 자아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된 자아가 생겨나는 증상을 가리킨다. ‘트라우마’라고도 불리는 강박증은 라캉 철학에서, 한 인간이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동안 억압되었던 실재가 회귀하면서 무의식이 끊임없이 개입하여 의식을 위협하는 상태라고 하였다.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히스테리 환자와는 달리, 강박증 환자는 허약하게나마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히스테리가 여성의 질병이라면, 자아가 존재하는 강박증은 남성의 질병으로 여겨져 왔다.
어머니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니나는 이렇다 할 자아를 성립하지 못했다. 자아가 부재한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강박을 느끼며, 성립되지 않은 자아를 분열시킬 수 있었을까. 히스테리 환자들은 ‘진짜 자아’가 없음을 숨기기 위해 인위적 자아를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실제로 히스테리 환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며, 창작욕구가 있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건들을 꾸며내어 그것을 직접 체험한 척 연기를 하는 능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히스테리 환자들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자신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상상 속의 초자아를 ‘낯선 자아’로서 현실에 데려온다. 니나에게는 릴리가 ‘낯선 자아’가 되겠다. 즉, 릴리는 니나의 분열된 자아가 아니라, 니나가 만들어낸 사이비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강박증을 느끼고 거짓으로 고통을 받는다. 사실은 텅 비어 있는 니나. 그녀는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감독(뱅상 카셀)을 찾아가기도 하고, 술과 마약을 하고 클럽에서 남자들과 무분별한 관계를 즐기며 선배 ‘베쓰’(위노나 라이더)의 타나토스적인 욕망을 따라해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백조에게서 흑조가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서 자아를 형성할 수가 없었던 그녀가 드디어 어머니의 세계를 깨고 나온 것이다. 자아가 부재했던 니나에게 ‘블랙스완’이라는 낯선 자아가 생겼다.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이비 자아일지라도, 스스로 자아를 찾아내어 세상에 독립된 주체로서의 욕구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깨어난 이 블랙스완에 니나는 적응을 하지 못하며 균열을 느낀다. 결국, 니나는 다시 백조를 부활시킨다.
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너야.
‘진짜 자아’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니나는 다시 백조의 옷을 입고 흑조를 죽이고 만다. 부재한 자아를 찾아내고 싶은 욕구가 표출되어 흑조가 탄생하였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나온 허상에 니나는 다시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니나(백조)와 릴리(흑조)의 몸싸움에서 거울이 깨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니나가 깨진 거울조각으로 릴리를 찔러 살해하였던 장면은 큰 시사점을 암시하고 있다. 라캉은 태어나서부터 인간이 겪게 되는 세계를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로 나누었던 바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실재계에 속해 있는데, 인간이 ‘거울’을 보면서 상상계로 진입하게 되고 이를 ‘거울단계’라고 하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상상적 자아가 형성된다. 상상계는 어머니의 세계로,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어머니와 완전한 일체감을 가지고 만족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개입으로 ‘거울’은 깨진다. 인간은 절대적인 이상이 존재했던 조화로운 동화적 세계와 이별하고, 문명과 규율의 세계에 종속된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상상적 자아는 무너지고, 상징적 개념이 형성되면서 주체적인 자아로서 사회(아버지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블랙스완>에서는 니나의 아버지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영향력 속에서 어머니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니나는 상상계에 고착화되어 있는 캐릭터다. 어머니의 세계 안에서 독립된 인격으로서 성장하지 못했던 니나. 이 때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상상계가 무너지고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서 상징계에 들어서게 되지만, 니나에게는 어머니의 세계를 종결시켜줄 아버지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이끌어줄 아버지의 부재는 곧 니나의 ‘자아 부재’와도 연결해볼 수 있겠다. 니나는 부재한 자아를 찾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릴리’를 만들어냈지만, 니나 자신과 릴리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거울 속의 ‘나’를 ‘나’로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니나가 릴리를 자기 자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 떨어진 객체로서 살인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흑조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니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릴리가 니나를 찾아왔던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니나의 앞에서 웃고 있는 릴리. 그렇다면 조금 전에 자신이 죽인 릴리는 누구인가. 니나는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사건의 전세가 반대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급전’이라 한다. 흔히 반전이라고도 하는데,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을 말한다. 또한, 이런 급전은 ‘발견’을 통해서 일어난다. ‘발견’이란,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지(知)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으로 급전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의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순간을 발견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환기하여 최종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잘 느끼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최고의 비극은 급전과 발견이 수반된 비극이라고 하니, <블랙스완>은 최고의 비극인 셈이다.
깨진 거울 앞에 멈춰 선, 니나. 그토록 찾고 있던 파렴치한 범인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니나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니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기가 가져온 참혹한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손에 들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깨진 거울 조각. 날카로운 거울조각이 향했던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거울을 깨뜨려줄 아버지가 부재하였으므로, 니나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거울을 깼다. 깨진 거울 앞에서 ‘니나’ 자신과 ‘릴리’가 결국 같은 자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니나의 발견의 순간이 되었다. 또한, 상상적 자아였던 블랙스완을 직접 죽이고, 독립된 자아로서 스스로 상징계에 들어서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부당하게 불행에 빠졌을 때,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며 측은해한다. 이러한 감정을 비극론에서 ‘연민’이라고 한다. 연민은 ‘공감’을 바탕으로,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 감정이입하여 함께 고통을 느끼며 발생한다. 여기서 공감을 넘어서 그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동일시’와 함께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공포’다. 관객들이 연민과 공포를 환기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비극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감정을 배설하면서 그 자체에서 쾌감을 느낀 관객들은, 극에서 동일시되었던 자신을 분리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주인공의 불행이 결국 자신의 불행은 아니라고 안도하며, 최종적으로 감정의 정화인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거울 속의 세계에 존재해야 했던 거울자아 블랙스완 ‘릴리’. 하지만 니나는 릴리를 거울 밖의 실재계로 끌어내었다. 거울이 깨지면서 릴리 역시 죽었고, 릴리와 같은 인격인 니나도 죽음을 맞는다. 니나가 상징계로 들어선 순간, 그 첫 걸음이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니나를 옭아매고 있는 깨질래야 깨질 수 없는 삶의 족쇄를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족쇄를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거울까지 깼지만, 새로운 세계로 간다 하더라도 니나를 옭아매고 있는 억압의 틀은 깨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갇혀있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유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토록 갈망했던 완벽함을 느끼며 눈을 감는 니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깊은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하였다. 만약 니나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느 날 갑자기 내안의 ‘낮선 자아’가 등장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니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누구나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 거울이 지금 진정한 자아를 가두어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족쇄는 아닌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히스테리는 여성들에게만 발생하는 질병이 아니며, 현대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증상이 되었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억압의 틀 안에 갇혀 있는가. 그 틀이 혹시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억압은 곧 폭력이고 학대이다. 지나친 자기 학대는 니나가 릴리를 찔러 죽였듯이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다. 거울은 결국 허상이며 깨져야만 한다. 거울 속에 있어야 하는 낯선 자아가 거울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비극은 시작될 것이다.
#블랙스완 #대런아로노프스키감독 #영화
#영화비평 #매체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