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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소년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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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피를 못 잡는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다.
바람의 방향에 휩쓸려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는 이 하얀 먼지들은, 어지러이 세상을 맴돌며 서울 하늘을 갈랐다. 정처 없는 방황 끝에 어느 차가운 응달에 착륙하여 스러지면서, 흑백영화 같은 생의 순간들이 곳곳에 쌓여갔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꾸무럭한 날씨였지만 구름 뒤편에서도 해는 저물고 있었다. 어스름한 초저녁의 분위기가 풍겨오고, 붉은 낮달은 흐린 하늘에서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며 스산함을 자아냈다.
새해가 되고 삼일이 지났지만, 주민들의 마음속엔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 아직 버티고 있는 듯했다. 입구에서부터 힘있게 펄럭이는‘1979년 기미년도 잘 살아보세!’라고 적힌 큼지막한 현수막이 이를 대변하였다. 현수막에서부터 골목길을 따라 대여섯 상점을 지나다 보면 ‘은마전파상’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바로 이 작고 보잘것없는 눈 쌓인 전파상에서부터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시작은 어느 흑백화면이었다. 조그마한 흑백텔레비전 속으로 어느 만화영화의 장면들이 지지직거리며 빛을 발하였다. 텔레비전 앞에는 준원과 정범이 나란히 앉아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옥경이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것들아, 또 테레비냐. 숙제는 다 했니?”
“지금 동화극장 하는 시간이야. 이거 끝나고 할게.”
옥경은 김이 나는 호떡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준원의 어깨를 툭 쳤다.
“뒤로 좀 가라. 눈 나빠져. 그래서, 오늘은 뭔데?”
“15소년 표류기. 오늘만 하는 특집이야.”
“엄마, 이거 진짜 재밌어. 여기 형아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지금 막 무인도에 도착했어.”
옥경이 가져온 호떡 하나를 입에 물었다가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며 도로 뱉는 정범이었다. 작은 몸뚱어리에 희멀겋고 둥그스름한 얼굴에서는 일곱 살다운 앳됨이 묻어나왔다.
“15소년 표류기. 알지. 엄마도 어렸을 때 재밌게 봤었어.”
“엄마도 이거 알아?”
“엄마는 책으로 읽었어. 작가가 쥘 베른이었나.”
준원은 호떡을 불어 열기를 식힌 다음 정범의 앞에 다시 놓아주었다. 정범이보다 키가 훨씬 크고 깡마른 준원은,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 탓이었는지 왠지 모를 듬직한 느낌이 있었다. 열 살의 문턱을 갓 넘은 조금은 조숙해 보이는 준원이었다.
“엄마 볼일 있어 나갔다 올 거니까 정범이랑 여기 좀 잘 지키고 있어. 아빠는 금방 오신다더라. 그거 끝나면 숙제하고.”
“언제 오는데?”
“저녁 먹기 전엔 와. 둘이 싸우지 말고!”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준원과 정범에게 그거만 보고 꼭 꺼, 하고 다시 한번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 옥경은 방을 나갔다.
카운터에는 텔레비전, 라디오, 전축, 선풍기 등 각종 전자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준원은 아빠가 미처 정리하지 않고 두고 간 듯한 드라이버를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겼다. 준원의 앞으로 장난감 워키토키를 들고 여기는 은마전파상 응답하라 오바, 하며 정범이 설치고 뛰어다녔다. 그러다, 다소 심각해진 준원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정범은 준원에게 워키토키를 건넸다.
“형아, 형아는 이런 거도 있는데 왜 모험을 안 떠나? 우리도 무인도로 모험 떠나자.”
워키토키의 줄을 목에 걸며 준원은 정범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다. 방금 본 만화영화가 이 일곱 살 어린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듯하였다. 가슴 속에 무언가 용솟음치며 올라왔던 것은 준원도 마찬가지였다.
“무인도에 가면 형아 숙제 안 하고 나랑 계속 놀 수 있잖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어.”
“더이상 엄마아빠 안 기다려도 되고. 그치?”
“맞아. 엄마아빠는 우리를 너무 기다리게 해.”
“오늘도 저녁 먹기 전에 온다고 해놓고서.”
때마침 9시를 알리는 자명종 시계들의 알람소리가 전파상에 울려퍼졌다. 제각각 다른 소리로 울어댔지만, 한날한시에 잊지 않고 정각의 약속은 꼭 지켜내는 지조 있는 시계들이었다. 매번 지켜지지 않았던 약속들로 가득한 전파상의 저녁, 규칙적으로 울어대는 시계들은 적막한 공간을 메우며 형제를 위로해주었다.
“어른 없이도 우리끼리 오순도순 잘 살 수 있어. 그치?”
“맞아, 형아. 우리끼리만 있으면 더 재밌을 거야. 그치?”
“좋아! 우리 무인도에 가서 간섭없이 살자!”
“좋아! 그럼 현주 누나한테도 무전해볼까?”
“현주 누나?”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준원의 목에 걸린 워키토키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기는 정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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