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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소년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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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육대주 형태의 세계전도 비스무리한 그림이 칠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했는지, 분필가루 가득한 희끄무레한 칠판이었다. 잠들어있는 어느 미지의 세상을 희뿌연 안개가 아슬아슬 품고 있는 듯했다. 현주는 칠판 앞에 서서 자신이 그려낸 작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삐뚤빼뚤한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우개를 들고 다시 지우려는데, 현주의 손목을 준원이 잡았다. 옷소매가 살짝 걷히며 손목에 길게 그어진 벌건 자국들이 보였다. 아아, 손목을 움켜쥐며 현주가 들고 있던 지우개를 떨어뜨렸고, 분필가루가 날렸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든 뭐 중요해? 이거 하나 있으면 되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분필을 집어든 준원은, 그림 속 태평양으로 보이는 곳 어느 부근에 거침없이 나비 모양을 휘갈겨 그렸다. 준원의 그림을 본 현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누나가 저번에 알려줬잖아. 행복만 있는 아름다운 섬. 이걸 빼먹으면 어떡해. 이건 반드시 그렸어야지.”
“이걸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 먹어도 먹어도 계속 자라나는 별사탕 풀, 노래하는 꽃, 맨날 웃기만 하는 폭포. 무지개방귀 뀌는 유니콘도 있잖아.”
“밤은 없고 하루종일 낮만 있는 나라. 별들이 사는 소원의 나무. 파란 돌멩이. 신기한 샘물.”
“맞아, 그런데 그건 욕심내면 안 돼. 너무 많이 마시면 갓난아기가 될 수 있잖아.”
“우와, 나도 보여줘. 거기가 우리가 이제 가는 곳이야?”
와자작 달고나를 깨물며 정범이 현주와 준원의 틈에 끼어들었다. 정범은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멀뚱멀뚱 보다가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기 나비처럼 생긴데 가는 거야? 좀 못생겼다.”
“정범아, 그건 얘가 그림을 잘 못 그려서 그래.”
“야, 못생긴 게 뭐가 중요해. 저기를 가는 게 중요한 거지! 그리고 뭐, 이 정도면 그래도 잘 그린 거다.”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칠판의 희뿌연 그림을 보는 현주다. 눈 주위 검푸른 멍자국들을 뚫고 나오는 우수에 찬 눈빛 속에서, 조그마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난 어른이 되면 꼭 저기에 가서 살 거야. 행복할 거야.”
“왜 어른이 되어서 가려고 해? 지금 가면 되지!”
지지직. 정범의 목소리를 무전기 소리가 가로막았다. 현주와 준원은 동시에 목에 걸린 각자의 워키토키를 들었다.
- 여기는 범석 짐꾼이 필요하다, 오바
“무인도에 가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한바탕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책상에 쏟아낸 범석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우쭐대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문방구 집 아들 아니랄까 봐,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쓸어온 믿음직한 친구였다. 책상 위에 깔린 나침반, 고무줄 새총, 장난감 권총, 계란그물망, 가위, 딱풀 따위 것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한 달가량 준비해온 그들의 모험계획이 현실화되는 것에 들떠있는 아이들이었다.
“형아, 이건 뭐야?”
정범이 물건들 속에서 찾아낸 접이식 주머니칼의 칼날 부분을 펼쳤다. 번뜩이는 칼날에 두 눈을 빛내는 정범을 보며, 현주가 정범의 손에서 황급히 칼을 빼앗았다. 물건들을 뒤적이던 준원은 장난감 비비탄총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준원이 총 머리를 범석에게 조준하며 쏘는 시늉을 하자 범석이 이에 맞받아치며 쓰러지는 흉내를 냈다.
“혹시 무인도에서 우리가 악당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칼이랑 총은 꼭 있어야 돼.”
“형아, 나도 총 한 번만 볼래.”
“안 돼, 이건 열 살이 넘어야 가질 수 있어. 넌 너무 어려.”
“치, 그럼 만약에 악당이 나를 공격하면 어떡해.”
“걱정마. 넌 형아들이 지켜줄 거니까 이거나 가지고 놀아.”
뾰로통한 정범에게 범석은 망원경 대용으로 가져온 오페라글라스를 건넸다. 정범은 글라스를 눈에 대보더니 금세 흥미를 되찾았다. 글라스를 들고 교실 이곳저곳을 나돌아다니며 꺄르륵꺄르륵 즐거워하는 정범이다.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 앞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멀대같이 생긴 승혁이 서 있었다. 승혁의 양 속에는 어느 집 한 채를 털어왔는지 터질 듯한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무심한 표정의 승혁은 별 건 없고, 하며 책상에 비닐봉지를 툭 올렸다. 벌어진 틈으로 과자봉지들이 보였다.
“오오! 새우깡, 꿀꽈배기, 라면땅, 쫀드기... 별사탕까지!”
“여기 쌕쌕이랑 딸기우유도 있어!”
“먹고 살아야지. 식량 책임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냐.”
아이들이 봉지 안에 관심보이는 동안 승혁은 범석이 가져온 나침반, 그물망, 주머니칼 따위 것들을 훑었다.
“우리 무인도 가려면 지도 같은 거 필요하지 않냐?”
“나침반 있잖아.”
“지도를 보고 가야 폼나지. 그래, 저런 거.”
승혁의 손가락은 저 앞의 칠판으로 향해있었다. 안개 너머로 사라질 듯했던 희끄무레한 세계전도는 승혁의 손가락으로 다시 존재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저건 현주 누나가 그린 건데.”
“그럼, 누나가 저걸 종이에 그려주면 되겠네.”
아이들의 요구에 현주는 곧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흰 종이에 검은 선들이 조심스럽게 수차례 오갔고, 마침내 드러난 어떤 형태에 이번에는 잊지 않고 나비 모양을 그려넣은 현주였다.
“세계지도에 이런 게 있었나?”
“누나는 6학년이잖아. 6학년 때 배우는 건가 보지.”
“우리 형이 중학생인데 이런 거 없다고 그랬거든!”
“규식이 형이 공부를 안했나 보지. 4학년은 가만히 있어라.”
“야! 말 다했냐! 규식이 형 전교 일등이거든!”
“뒤에서 일등 아니고?”
세계전도에 등장한 미지의 섬에 논쟁을 벌이는 범석과 승혁에게, 우유병의 뚜껑을 따주며 준원이 달랬다.
“저기가 우리가 갈 곳이야. 우리들의 행복한 무인도. 그래서 원래 세계지도에는 없는 거야. 어른들이 알면 안되잖아.”
승혁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범석이 되물었다.
“지도에 없으면 저기를 어떻게 찾아가는데?”
“형아, 우리가 그리면 되지. 우리는 저기가 어딘지 알잖아.”
“병신아, 저게 지도에만 안 그려있지 실제로 있다잖아. 넌 눈앞에 보여야만 있는 거냐. 애가 상상력이란 게 없어. 일곱 살 정범이도 다 이해하는구먼.”
“이 자식이 아까부터 과자만 가져와놓고 왜 시비야!”
“뭐!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데! 너 로빈슨 크루소도 모르지?!”
“야야, 그만들 좀 해! 그럼 이것도 가져가자.”
언성이 높아지며 격해진 범석과 승혁의 사이로 현주가 6학년 사회지리부도책을 내밀었다. 책장을 빠르게 휘리릭 넘기자, 수많은 나라의 지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제 됐냐, 하는 현주의 말로 논쟁의 불꽃은 어느 정도 꺼졌다. 범석은 가방에 도로 물건들을 챙겨 넣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내일 아침 10시에 통인시장에서 보기로 기약하며, 가방을 메고 문 앞에 선 범석이다. 내가 이상한 거야? 이대로 괜찮은 거지? 고개를 갸웃대다가 문을 박차고 나간 범석을, 준원이 따라나갔다.
나침반, 오페라글라스(망원경), 그물, 가위와 풀, 칼과 총, 망치, 톱, 밧줄, 성냥, 몇 가지 과자와 병음료, 정범의 애착담요, 팽이, 고장난 라디오, 사회지리부도책, 실과책, 장난감 워키토키, 그리고 나비섬이 그려진 진짜 세계지도 종이.
이것이 아이들이 무인도 모험을 떠나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저 먼 나라에서 시대를 건너 넘어온 그 흑백 만화영화가 대체 뭐였길래. 색깔도 없는 검고 하얀 장면들은 이 다섯 아이들의 가슴에 묻혀있던 꿈들에 색깔을 칠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2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그 전에, 그러니까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기 전에, 몇 가지 사소한 사건들이 있었다.
한달간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일명 ‘무인도 탐험대’가 하빈에게 딱 들켰던 것이었다. 하빈이는 선생님인 엄마를 보려 방학임에도 학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일곱 살짜리가 유치원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마 더 길었을 것이다. 그날도 하빈이는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이들의 비밀작전을 모두 들었고, 평소에 좋아하던 정범이 속해있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고, 하빈이도 이 작전에 끼워준다는 조건으로 엄마에게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현주의 아버지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현주의 아버지는 현주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에, 몰래 외출을 시도했던 현주는 저녁 내내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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