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恐白)_8화

by HANA





8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런 장비도 하지 않은 채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죽을 것만 같아서 무거운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들이마신 숨을 내쉬는 데엔 또다시 한계가 왔고, 숨이 넘어가 죽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앞을 턱 막고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제대로 가위가 눌렸나 보다.


숨을 죄여오는 그 공간이 점점 내 몸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하얀색.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온통 하얗기만 했다. 나는 더욱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존재가 사라진 듯한 공간 속에서 나는 존재를 잃어버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과연 어디인 걸까. 내가 살아있기는 하는 걸까. 뭐 하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공에 시선을 띄우며 하늘이라 생각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서야 눈을 가리고 있던 희뿌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하늘엔 검은 사선들이 가득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거칠고 희미한 선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겨진 하늘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너덜너덜하여 금방이라도 접힐 것만 같았다. 그나마 검붉은 딱지들이 빈틈을 단단하게 막고 있어서 하늘은 무사히 버티고 있었다. 하늘 바로 아래에는 거대한 바윗덩어리 몇 개가 위태롭게 공중에 걸려 있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그것들은 이 공간 속의 공기를 모두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검은 사선들이 갈기갈기 찢어놓아 피눈물을 흘리는 하늘 그 아래의 세상은.


고요했다. 한 달간은 쉬지 않고 폭설이 내렸는지 두꺼운 눈 이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깨끗하고 고요한 이 공간은 아직 아무에게도 빛을 보이지 않은, 갓난아기의 감은 눈 속의 세상 같았다.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은 광활한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청각을 잃은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고요함 속의 평화는 전혀 평화롭지 않았고, 오히려 불안함에 내 몸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 때, 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 저 편에 드디어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너무 눈이 두껍게 쌓여 한 발자국 떼기도 힘든 그 눈밭을 죽을힘을 다해 헤쳐 나갔다. 작은 나무 하나가 눈에 파묻힌 채 힘겹게 서 있었다. 나무는 겨우 내 무릎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았는데, 가지들이 다 잘려져 있었고 잘려진 가지들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의 필체를 보는 것 같아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 때 나무가 눈을 뜬다. 눈에 파묻혀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꼼짝 없이 서 있던 그 나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가 나에게 초점 없는 눈을 고정하며 눈가의 검은 피를 쓱 닦는다.



“안녕. 빈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내게 칼을 들이대며 활짝 웃고 있었다. 빈 공간을 가득 담은 그녀의 차가운 눈이 섬뜩하게 나를 쏘아봤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웃고 있는 입을 계속해서 부르르 떨었다.



“나, 나를, 어떻게 알죠?”

“그동안 당신이 나를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항상 내 공간 곁을 맴돌았죠. 그렇지 않나요?”

“그걸, 다,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죠. 당신은 매일 제 꿈속에 찾아왔으니까요.”



그녀는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쏘아보았다. 칼은 여전히 내 목에 겨눈 채.



“이젠 내가 너의 꿈을 찾아왔어.”

“그게 무슨.......?”

“여긴 아무도 없어. 많이 아팠는데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더라고. 혼자 있는 거 너무 무서워. 외로워. 그래서 내가 널 여기로 초대했어. 나만의 공간에 온 걸 환영해.”



칼을 들이대며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입이 점점 커진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녀가 너무 무서워 도망을 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검은 피에 엉켜 있는 여자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미치겠다. 앞에선 여자아이가. 뒤에선 그녀가. 대체 여긴 어딘 거야. 난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야 하는 거지.



“설마 너도 날 버리진 않겠지?”



등을 가르는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설마 저번처럼 나를 버리진 않겠지? 버리지 마. 버리면 너무 아프잖아. 아직 어린 아이잖아. 연약한 아이일 뿐이야. 그 아이를 미워하지 마.”



여자아이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여자아이. 아니.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였다. 아니. 그 남자아이는 나였다. 어린 시절 사람을 죽이던 엄마를 보고 놀라 도망가던 남자아이. ‘무서워’ 하고 말하는 아이의 입모양이 내 머릿속을 후벼 판다. 눈을 감았다 뜨자 다시 여자아이로 돌아왔다. 가지 마. 다시 남자아이로. 안아줘.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여자아이로, 남자로, 그녀로 변하는 작은 나무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그녀. 내 안 깊숙이 구깃구깃 접혀 있는 나의 낡은 공간이 다시 펼쳐질까봐 두려웠다. 나를 버리지 마. 가지마. 그녀가 미친 듯이 쫓아온다. 나의 과거가 미친 듯이 쫓아온다. 잊고 싶었던, 버리려 했던 나의 깨진 거울조각들이 하나씩 날아온다. 그녀는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아니야. 넘어졌다. 112를 누르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가 사람을 죽였어요 빨리 와서 엄마 좀 잡아가세요. 칼을 들고 나를 죽일 듯한 표정을 하며 째려보던 엄마가 경찰서에선 내 얼굴을 부여잡고 울었다. 나는 그 눈 속에서 읽었다. 너 때문에 모든 걸 망쳤어 미워죽겠어. 그래서 난 누나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했다. 내 피아노는 엄마를 죽이고 어린 시절 사랑을 갈망하던 나도 죽였다. 사랑을 잃고 사랑을 노래하던 나의 작은 피아노. 누르면 내 안에 숨겨진 소리가 나지요. 나를 눌러볼래요? 내가 눌러질 때마다 누나가 죽었고, 여자 친구도 사라졌다. 그럼 이제 점점 가까이 오는 그녀가 사라질 차례인가. 그녀가 바로 내 앞으로 와 씨익 웃었다. 오랫동안 나를 찾아 해매던. 그렇다.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그 때 나는 보고 말았다. 두꺼운 눈 이불이 감추고 있는 실체를. 수많은 시체들이 눈을 하얗게 치켜뜬 채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충격에 휩싸여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덜덜 떨려오는 그림자를 감추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섰을 때, 난 시체더미 속에서 입꼬리가 올라간 누나의 시체를 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새벽 3시 반. 꿈이었다. 여전히 창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도 검은 피아노는 더욱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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