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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Jan 08. 2022

나답게, 그리고 너답게

검은 파카를 입은 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노랑 파카를 챙겨입은 달이 해를 뒤따르고, 큰딸과 사위까지 나오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네 식구가 보라, 빨강, 노랑이 알록달록한 가방이며, 검정, 회색까지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짐가방을 나눠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오른다. 해와 달이 뒷좌석에 앉아 룰루랄라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큰딸과 사위가 번갈아 가며 보내는 카톡을 보고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같이 훤히 보인다. 네 식구는 오늘도 캠핑을 떠난다.


저녁이 되어 하루 동안의 사진을 무더기로 전송받는다. 카톡 덕분이다. 사진에는 해와 달, 큰딸과 사위가 번갈아 등장한다. 네 식구가 한결같이 다르다. 가끔은 나를 포함해 보통의 부모들이 그렇듯, 큰딸과 사위도 “해가, 달이 나를 닮았나 봐~.” 말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그저 각자 다르게 태어난다. 그야말로 타고난 저마다의 특질들이 부모와 형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과 각양의 환경을 만나 역시 제각각의 인물이 되어간다. 며칠 전 읽은 책에 의하면, (이것 역시 사람이 알아낸 범위 안에서만 그럴 테지만) 은하계 안에만도 천억 개 이상의 다양한 별들이 있으며, 지구 위에 사는 개미 종자는 1만 2천 종, 파리는 8만 5천 종, 소라는 1만 8천여 종, 육지의 달팽이 만 3만 5천 종, 매미는 2500여 종, 국화는 2만 여종에 이른다고 하니 말이다.


해는 동그란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대충 길쭉한 편이다. 키가 그렇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역시 길다. 생각과 동시에 나오는 말의 속도가 빠르다. 생각이 쉬지 않고 대화의 내용은 경계를 허물고 아무 곳으로나 뻗어 나간다. 함께 하는 대화가 재미있다. 감성이 풍부한지, 함께 이야기할 때면 ‘맞아’, ‘저런’, ‘어머나’, ‘슬퍼~’ 등등의 감탄사들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두 돌도 안 되었을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하늘색 버스다. 나는 하늘색이 제일 좋아!’라고 말하곤 했는데,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음식을 먹는데 별 관심이 없다. 입이 짧은 편이다. 늘 먹는 음식만 먹는다. 딸기, 수박이, 포도는 입에 대지 않는다. 겨우 사과와 귤을 먹을 뿐이니 돈은 들어가지 않아 좋지만 어쩌다 비싼 과일이 있어도 먹지 않아 안타깝다. 앗! 지금 싸서 별로이고 비싸서 좋은 과일이라는 나의 가치판단이 드러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실수지만, 다만 서로 다른 영양소가 있으니 골고루 먹으면 좋겠는 거다. 조금이라도 낯선 음식이라면 아예 먹어보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뭐든 ‘할머니 좀 줘’라는 말이 떨어지면 바로 음식을 나눈다. 돈가스며 탕수육에는 절대적으로 소스를 찍어 먹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악어로 통용하며 한 가지로 알고 있었던 엘리게이터와 크로커다일이 실은 다른 종이라는 것을 내게 게 알려준 게 해다. 제 엄마가 장폐색으로 병원에 입원해 내가 가 있는 동안 해가 혼자 책을 읽다가 흥에 겨운 채 콩콩 뛰며 내게 가르쳐줬다. “크로커다일은 바닷물에서 살지만, 엘리게이터는 소금물이 아닌 강에서 살아요. 음~ 그래서 엘리게이터는 바닷물에서는 오래 살 수가 없어요.” “해!. 너는 나중에 과학자고 되고 싶은 거야? 과학적 지식이 많네~” 라고 묻자 그건 아니란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가사를 다 외우고 있다. 해 본인의 말에 의하면 역사를 존중한다나! 그래서인지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다. 어쩌다 대화에 남아프리카라는 단어가 나오면, 만델라 이야기를 꺼내는 식이다. 우리 집에 오면 할아버지가 마련해둔, 달이 지나 떼어놓은 달력 종이가 있는 곳을 뒤져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한때는 이순신 장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수군들과 원균과 같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거북선과 같이 그려 넣는데 종일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로봇이며 만화 캐릭터들을 잔뜩 그린다. 어려서는 청소기 소리를 들으면 울었고, 조금 커서는 ‘음메~’ 소리에도 울었고, 그래서 장난기 발동한 엄마, 이모 심지어 할머니까지 ‘음메~’ 소리로 어린 것을 울려가며 그게 좋다고 사진으로 저장해놓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는 ‘엄마가 섬 그늘에~’ 자장가를 들으면 슬피 울었다. 최근 <신비아파트>를 즐겨본 후로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친한 친구가 집에 데려다주곤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가 핸드폰을 사줬지만, 처음에는 핸드폰을 사랑하지 않아서 통화가 잘 이뤄지지 않다가 핸드폰 앱으로 게임을 즐기게 된 덕에 요즘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모가 해의 카톡이나 문자를 받는 호사를 ‘어쩌다’ 누려보기도 했다. 팽이게임을 제일 좋아한다. 아무리 해도 지칠 줄 모른다. 동생 달이 안쓰럽다. 형 해가 팽이게임을 하자고 할 때마다 고역인 눈치이지만, 할 수 없이 형과 게임을 해주는 모양이다. 감정이 충만해 목소리가 크고 흥분하기도 잘하며 목소리가 크다.


둘째 달의 머리는 갈색이다. 머리숱이 적은 편이라 파마를 했는데, 곧잘 어울린다. 꼬불거리는 갈색 머리 없이 달을 떠올릴 수 없다. 그런데 가끔은 사람들이 해와 달을 여자아이로 보고, ‘언니와 동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앞으로 파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기럭지가 평균보다 약간 짧은 대신, 몸이 탄탄하다. 동글동글하고 새까만 눈동자가 깊은 것이 매력이다. 말이 빠르지 않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생각을 거쳐 나오는 듯, 매우 논리적이다. 해가 야단맞은 일을 금방 잊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편이라면, 달은 자신이 야단맞은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자신을 야단친 엄마나 아빠 혹은 그 외의 누군가가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그 맥락을 잊지 않고 기억해뒀다가 해명하거나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낸다.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뭐든 일단 먹어보기로 하고 관심 있는 음식을 자기 앞으로 모은 후 아주 느린 속도로 음미하며 침착하게 먹기를 좋아한다. 어려서는 높은 곳에서도 겁 없이 폴짝 뛰어내리고, 거침없이 달려 어딘가에 세게 부딪히면 어쩌나 걱정을 사곤 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겁이 많아 무조건 달려드는 일이 없다. 지금은 새로운 사물,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 다만 지식을 가지려 하는 대신, 직접 만지고 느껴보려고 한다. 그러니 화분을 깨뜨리고, 물건을 떨어뜨려 고장 내기 일쑤다. 어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사물에 접근하려니 소리 없이 사라진다. 조금 후 ‘쨍그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왔다가 꽤 커다란 화분을 깨뜨렸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괜찮아.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라며 손을 잡아 주려는데 손을 빼며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걸 보면서 이런 일로 자주 혼이 낫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큰딸이 어린 시절 이런 사고가 있을 때마다 내가 큰딸을 심하게 야단친 것을, 훗날 많이 후회했다. 이모 말에 의하면 그런 사고는 말썽부리는 게 아니라, 관심사가 달라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달에게는 세상이 호기심 천국인 듯하다. 쌍꺼풀이 있는 크고 까만 눈으로 터질 듯 말 듯 아깝듯이 주는 웃음을 웃는다. 은밀한 구석이 있다. 해가 콩나물, 미역국, 카레, 소스를 뿌린 돈가스를 좋아한다면, 달은 시금치, 청국장, 된장찌개, 두부와 달걀, 낫또를 먹고, 심지어 과메기를 먹기도 하는데, 돈가스나 탕수육에 소스가 묻으면 절대 먹지 않는다. 딸기, 포도, 수박을 잘 먹으니 형이랑 부딪칠 일이 없다. 서로 다른 해와 달이 앞으로는 또 어떤 모양으로 바뀌어 가며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갈지 궁금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차곡차곡 기억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언제라도 그 이야기들을 들려줘야겠다. 큰딸이 내가 알지 못하는 해의 변신을 들려준다. 이젠 책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만화만 좋아한단다. 학교에서는 도서관 소년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도서관을 재미있어하는데, 아마 만화 때문인가보다. 해와 달, 둘의 관계성도 달라지고 있단다. 한때 달이 형 해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도리어 먼저 형에게 손찌검했는데, 요즘은 형이 시키는 심부름을 거의 다 하고, 형이 동생을 마구 놀려대는 식이란다. 둘이 딴 판으로 다르게 태어났고,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변화하며 풍성하게 될 손자들 해와 달의 삶을 언제라도 응원할 것이다. 딸들과 사위들을 응원하며,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여러 모양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어쩌다 TV 프로그램 유퀴즈를 본 적이 있다. 그때 걸그룹 가수 CL의 아빠이며 공학박사로 최근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 측정이 가능한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가 출연했다. 딸 이야기도 있었다.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 그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강변을 달리는 차 안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왜? 라고 묻지 않았다. 왜냐고 묻기 시작하면 서로를 아프게 할 말들이 오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본인 스스로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겠어요?!’ 가 이유였다. 그리고 그가 딸에게 한 말은 ‘그래 알았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딸을 위한 동화책을 만든 아빠의 답이 그랬다. 딸은 아빠를 ‘그냥 이기진’이며 ‘친구’라고 했다. 그런 아빠가 있는 딸은 그 사랑과 믿음을 공급받으며 모진 세상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또한,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들을 길게 혐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저 해와 달이, 딸들과 사위들이 저 있는 모습 그대로. 혹은 잃었던 모습이 있다면 되찾아 살게 되기만 바란다. 그런 세상이 되기를 나의 신께 빌고 있다. 행복이란 많고 대단한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는 데서 온다는 것을, 건강을 찾고 보니 나이가 들을 대로 들어버린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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