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Jan 09. 2022

할아버지를 부탁드려요.

독서모임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3호선 전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탔습니다.

내 맞은편 자리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할아버지 몸이 45도 이상으로 기울어있던 겁니다. 뭔가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할아버지 곁으로 건너가 앉았습니다. 할아버지께 똑바로 앉혀 드리겠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밀어 똑바로 앉혀 드리려고 했지만, 저 역시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남자분들 와서 도와주세요.” 중년 남자분들이 여럿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멀뚱멀뚱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 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또 한 번 소리쳤습니다. 젊은 여자 청년만이 왔습니다. 청년이 할아버지 주머니 안에서 전화 소리가 난다고 햇습니다. 할아버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빼내어 방금 왔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버지?” 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따님이세요? 아버님께서 6호선 전철 안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신 채 쓰러져 계셔요. 몸이 아프셨나요?” 물었습니다. “아닌데요. 거기가 무슨 역이죠?” 물었습니다. “새절역이요.” “내리지 못하고 그냥 가신 거예요. 그 근처에 ㅇㅇ 병원이 있으니 그곳 응급실로 모셔주세요.” 했습니다. 역무원에게 알려 그리하겠다고 답하고 비상 전화를 발견해 상황을 알렸습니다. 전철이 멈추고 방송이 나왔습니다. “환자가 있어 환자를 환자에게 조치를 취하고 출발하겠으니 양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곧 역무원 둘이 내려왔습니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역무원 둘이 할아버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일으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마비되신 상태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를 질질 끌고 나가려 했지만 그것 조차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시 소리쳤습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누군가가 억지로 일어난 듯 굼뜨게 다가와 할아버지 다리 하나를 들었고 할아버지의 남은 다리 하나가 바닥으로 덜어졌습니다.

아까 그 청년이 그 다리를 들었고 할아버지는 거의 끌려나가듯 전철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119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청년이 전철로 되돌아왔고 다시 저와 함께  따라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전철 문이 닫히고 출발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앞에 오더니 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아까 할아버지 다리를 붙잡아준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의 내용이란 게 이랬습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이런 일이 생겨 또 늘어져 짜증나네.“

‘개ㅇㅇ놈’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흐르다 만 채 굳어있던 눈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함께 내리지 못한 저를 꾸짖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차갑고 좁은 나무 벤치에 겨우 눕혀졌습니다. 곧 119가 오긴 하겠지요. 그러나 딸에게 전화도 해드려야 했습니다. 혹 주머니에서 전화기가 떨어지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될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걱정인 건 굳은 몸을 그렇게 강제로 끌려나가다시피 들려져 내갔으니 할아버지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갔을지 모릅니다. 왜 휠체어도, 들것도 없이 역무원들이 그냥 내려왔는지도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매뉴얼도 장비도 없는 걸까요? 한 사람 정도 의무 요원이라도 배치되어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누구도 할아버지와 같은 당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제 도와달라는 외침에 일어서주는 사람이 그리 없을 수 있는 건가요?

미국보다 더 미국화된, 미국의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화된 한국 사회에서 하루하루 자기 살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각박해진 사회에서, 자기 가족도 사랑하는 이도 아닌 오직 돈만이 최고의 가지가 되었다고 하는 오늘 한국의 자화상으로 인해 모두가 그리된 건가요?


할아버지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요?

저 역시 급한 일도 없는데 왜 망설이다가 내리지 못하고 지금, 할아버지 상태를 알지 못해 마음 아파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뒤늦게 기도이며, 원망이며 꾸짖음인 이런 글을 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제 그 청년도 자와 같은 상태이겠지요. 결국은 잊히겠지만, 오랫동안 할아버지 얼굴의 짧게 흐르다 만 눈물은 잊혀지지 않을겁니다.

할아버지 눈물에 담긴 그 심정을 지금 헤아려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바쁜 상황이 아닌데도,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몸을 내어주는 데 다들 너무 인색하지 않은지요.


할아버지를 위해, 냉랭해져서 인간미를 상실해가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위해 잠깐 멈춰 기도할 뿐입니다. 다음에는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답게, 그리고 너답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