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Feb 02. 2022

결혼 42주년 7일. 신혼 2년 5개월 7일

구정 연휴 2일. 2월 2일이다.

아이들이 제 집으로 돌아갔고,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은,

작년 오늘,

결혼 41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시작한 날이라고 알려줍니다.

결혼 41주년 신혼 1년 5개월 이었던 작년 오늘!

올해 오늘은,

결혼 42주년 7일,

신혼 2년 5개월 7일이네요.

지금에 와서는 쉽지 않았던 지난 날들이 그저 다 괜찮은, 저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밑거름이 되어준 추억이 됩니다.


그리고 덧.

올 8월이 지나면,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 '어르신'이 되어 '지공대사'(지하철공짜대상) 되네요.


****


<결혼 41주년, 신혼 1년 5개월>

#이정도면충분한

 

“1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어떻게 지낼까?” “글쎄.”

 2021년 1월 25일 결혼 41주년을 두고 나와 남편이 2021년이 시작도 되기 전 2020년 12월부터 말을 주고받는다. 사실 뭐 별 것 없이 지내게 될 것이 뻔하다. 결혼하고 이미 41년을 보냈다. 나는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다섯, 남편은 소위 어르신이 된 지도 2년이 되어가는 예순일곱이다. 그런데도 살짝 들떠 있다.

둘째 딸 J2의 결혼을 앞두고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J2를 보내고 우리끼리 신혼으로 살아보자. 우리에게는 신혼이란 게 없었잖아. 알았지?" 이 말은 사실, 딸인 J2와 그 애인 Y의 결혼을 앞둔 남편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려고 그냥 한 말에 불과했다. 형식적인 결혼식은 필요 없다고 양가 가족의 식사만으로 결혼식을 대신하겠다는 J2와 Y의 결정에 몹시도 서운해하던 남편은 그 말에 정말 위로를 받은 듯했다. “우리끼리 신혼 생활을 즐기는 거야?!” 남편은 그렇게 내가 한 말을 되뇌며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섭섭한 마음을 털어낸 듯 딸의 출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다음부터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외식하자든가, 혹은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하자든가, 등등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계획할 때마다 남편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끼리 신혼 생활을 즐기는 거야!” 그의 말을 들으며 나도 ‘그래. 이런 게 신혼의 삶 아니었겠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이 생각을, 생각이 삶을 이끈다고 남편도 나도 그때부터 함께 신혼 감각을 계속해서 깨우고 있다.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에는 신혼이 없었다. ‘신혼’의 자리에 ‘생활고’가 있었다.  “어제가 우리 결혼 1주년이었잖아.” 1980년 1월 25일 결혼한 우리는 1981년 1월 26일 새벽에 눈을 뜨고서야 결혼 1주년을 기억한 것이다. 놀라거나 섭섭하지도 않았거니와 뒤늦은 세리머니를 할 마음도 없이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그리된 이유가 무엇보다도 나와 남편 두 사람에게 있었을지 모른다. 무슨 기념일이든 무덤덤하게 지나간다고 불평하긴 했지만, 이제까지 살아보니 남편에게도 내게도 원래부터 기념일 같은 것을 특별히 생각하고 '즐기는 능력'이 없다. 그렇더라도 당시 결혼 일주년을 그리 보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기념일 같은 것을 챙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1도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했다. 출산 계획?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빨리 임신이 될 줄도 몰랐다.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결혼할 때, 나는 우리나라 나이 고작 스물넷이었고 남편 역시 스물여섯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 둘을 포함한 다섯 식구에 허니문 베이비로 내 뱃속에 잉태된 첫째 딸 J1까지 모두 여섯 식구의 재산은 전세아파트가 전부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부지였다. 어머니 앞으로 남겨진 상당한 금액의 부채, 어머니와 시동생 용돈과 등록금, 먹고 살아가야 할 식생활비는 오직 남편 한 사람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형편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궁리해보지 않았다. 철부지를 넘어 바보였다. 결혼하고 나서야 현실이 보였다. 남편의 수입이 대략 월급 15만 원, 석 달에 한 번씩 받아오는 보너스 7만 5000원. 한 달 평균 17만 5000원. 내가 결혼 전부터 하고 있던 영 · 수 과외 수입 10만 원. 수입 합계 월 27만 5천 원이었다. 그러나 과외수업은 곧 불법행위가 되었다. 내가 과외를 그만두면서 평균 월수입은 오로지 남편의 수입 17만 5000원이 다였다. 남편이 월급을 타온 날, 나는 내가 놓여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날 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혔다. 관리비가 5만 원 가까이 나온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그 월급으로 감당해야 할 생활비 목록도 알려주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용돈은 50000원, 시동생 용돈은 25000원이라 하셨다. 반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막내 시동생이 좋아하는 장조림, 간식으로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다. 큰 시동생은 밑반찬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동생 등록금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 목록들을 들으며 입으로 ‘네!’라고 답했다. 그러나 머리는 계산기를 두드렸고 마음은 시끄러웠다. 강남의 기름보일러 아파트? 관리비 5만 원? 당시 은마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던 그때 강남 아파트가 지금처럼 비싸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상당히 비싼 편이었고, 기름보일러 아파트의 유류비는 오늘날과는 달리 상당히, 우리 형편에는 지나쳐도 한참 지나치게 비쌌다. 내 머리는 금세 계산을 끝냈다. 나는 수학을 잘했고 수학교육과를 막 졸업할 예정이었으니까. ‘강남 아파트도, 관리비 5만 원도 끝이다. 이사해야 한다.’ 집도 있고 빚도 없는 우리 부모는 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다. 그런데 여섯 식구가 가장 한 사람에 매달려 그것도 전세를 살면서, 강남 아파트라니? 기름보일러라니?!

나는 바로 남편에게 이사를 주장했고 남편이 동의했다.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불렀다. “이 월급으로 지금처럼 사는 것은 불가합니다. 연탄 아파트로 가야 합니다.” 어머니도 동의했고 전셋집을 찾아다녔다. 결혼 6개월, 배부른 임신부가 되어있었던 나와 가족들은 여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석수역에 있는 관악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내가 지출한 것은 오직 식비였으며 식품이란 정부미(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이 먹던 일반미보다 저급한 쌀을 싼값에 사 먹었다. 빛깔이 거무스름하고 찰기가 적고 맛이 덜했다), 두부, 달걀, 콩나물 정도였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양품점을 지날 때면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야. 쳐다보지도 말자’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엄마가 엘리야에게 떡을 물어다 주던 성경 속 까마귀처럼 시시때때로 김치와 반찬과 쌀을 날라 왔다. J1을 출산한 후에는 J1의 분유도 날라다 주었다. 곧 겨울이 되었을 때 연탄값을 충당할 수 없었다. 연탄보일러를 가동하는 대신 연탄난로 하나를 거실에 설치했다. 출산 후 친정에서 스무하루 동안 산후조리를 하고 온 후부터 냉방에서 딸 J1을 키웠다. 그렇게 살던 시절, 결혼 1주년은 기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없는 듯 흘려보내는 게 차라리 나은 것이었다. 모든 어려움이 지나갔고, J1에 이어 J2까지 Y와 함께 독립한 후, 나와 남편 단둘이 살고 있다. 결혼 후 처음이다. 그러니 지금 41주년 결혼기념일. 신혼처럼 들떠있을 만하다. 우리 부부는 이제 고작 1년 5개월 된 신혼을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책임을 미루는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