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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Sep 06. 2022

<세상이 이상해지지 않으려면>-1

그녀와 그녀들, 그들의 떠남을 응원한다 


7월 하순, 휴가철이다. 지인들의 서울 탈출 소식이 들린다. 나는 덥고 습한 무더위의의 7·8월 집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일을 떠난 지 오랜 나와 남편에게는 날이면 날마다 휴가다. 한창 일하는 사람들, 자녀가 학교에 다니는, 아직은 젊은이들과 달리 아무 때나 쉬고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셈이다. 하긴 무더위를 견디며 산이며 계곡이며 바다를 즐기는 것, 역시 젊음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

늙음에는 늙음의 특권이, 젊음에는 젊음의 특권이 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 같은 걸 누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름에서 갖는 특권이 있다면, 가진 게 많은 자가 자신의 특권을 누리듯, 없는 게 많아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는 살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세상은 가진 자가 없는 자가 가진 하나까지 빼앗으려 한다. 누군가의 말대로 세상은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빼앗으려는 이들 사이에 벌어지지는 전쟁터 같다.


젊음을 통과한(젊음을 실컷 활용하지 못했으니 ‘젊음을 누린’이라고 쓰기는 좀 그래서) 사람의 넉넉한 마음이라도 좋고, 전쟁터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고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응원하고픈 마음이라도 좋다. 쉼, 탈출, 극기, 일탈 … 뭐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그녀, 아직은 젊은 그녀의 떠남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녀를 알게 된 건 작년 여름이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으로 만났고, 이후 오프라인으로 세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 기간 중 그녀가 내게 기도를 부탁해도 되는지 물어왔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도 제목’을 보내왔다. 기도의 내용은 아름답고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기도 뒤에 붙어있는 단어, ‘제목’ 앞에서 나는 목에 뭔가가 딱 걸린 것 같았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그냥 기도의 대상 앞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거나, 궁금증을 풀어놓거나, 마음에 품은 사람을 그려보거나 그러다가 감사를 고백하거나, 간절한 바람을 빌거나, 글로 쓰거나 하는 게 기도인 내게 ‘제목’이라는 단어가 영 어색했다. ‘기도 제목’은 접수하되 내용은 내 마음대로, 내게 떠오르는 대로 하겠다는 전제로 기도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녀의 5남매 이름을 외우기 쉽게 내 멋대로 짓는 일을 감행했다. ‘산’, ‘바다’, 그리고 ‘강’, ‘들’, ‘꽃’. 사실 이들 이름 다섯을 지으면서, 나는 그 안에 그녀의 5남매 만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어린 것들, 내가 경험하는 '신'의 모든 자녀를 집어넣기로 했다. 그야말로 그 안에 진짜 산이며, 바다며, 강들이며, 들과 소위 잡초라 불리기도 하는 모든 꽃을 넣기로 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듯, 나는 그녀가 생각했을지도 모를 기도와는 판이하게 기도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 대로 내 식으로 기도한다. 그녀의 입장이 되어본다. 내가 그녀가 되어본다. 그녀의 페북 담벼락 사진에서 본 다섯 아이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녀의 ‘산’은 산처럼, ‘바다’는 바다처럼, 그리고 ‘강’은 강처럼, ‘들’은 들처럼, ‘꽃’은 꽃처럼 그답게 존재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지낸다. 세상에 태어난 내 신의 자녀들이 각각 그답게 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빈다.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가 부탁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수많은 그녀들을, 그리고 그들(남자들)과 그 아이들,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에 품는다. 그러니 그녀는 다만 그녀가 아니다. 생명을 키우는 생명이고,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며 아름답게 피어가기 위해 순례 이야기를 지어가는 생명 자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많은 그녀와 많은 그들, 그것들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키웠고 여전히 키운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자라게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녀를, 그녀와 그들을 산들을, 바다들을, 강들을, 많은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꽃들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날마다 그녀를 내 안에서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늘 내 안에 있으니까 말이다. 기도는 마음이지 주문이 아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두들기는 도깨비방망이는 더욱 아니다.  그녀가 나의 이런 기도를 용납해주기를 바란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내 배로 나은 아이들을 입으로 불러내어 기도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내 배로 나은 아이들은 항상 내 안에 살아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녀를 품을 때마다 기도가 달라진다. 매일의 삶이 바뀌듯 내가 바뀐다. 그녀의 하루도 시시각각 움직일 것이다. 내 기도도 움직인다. 기도는 죽은 듯,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있고 늘 움직이며 늘 변한다.      

그녀, 무려 5남매, 일곱 식구 살림을 꾸려가는 그녀가 오랜만에 집을 떠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되고 바쁜 남편과 머리가 커 자기만의 할 일이 있는 ‘산’을 뺀 아이 넷을 그녀가 데리고 떠난다고 했다. 설렘과 불안을 안은 채 6박 7일의 제주 여행길에 오른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은  내 마음이 그녀의 마음과 함께 설레며 동시에 그녀처럼 불안하다.  나는 고작 딸아이 둘을 키웠을 뿐이고 그것도 8년 차가 나는 터라 큰아이가 작은 아이를 얼마든지 보살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은 남편과 함께였다. 그런데 그녀는 고만고만한 아직은 어린아이 넷과 함께 떠난다. 아이들을 길러본 이라면 알 수 있는 엄청난 모험, 도전이다. 별수 없이 불안한 마음이 되어 안전하기를 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떠남으로써 갖고 돌아올 어떤 것들을 기대한다.      


‘그녀의 떠남은 그녀에게 어떤 자국을 남길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까?’

그녀의 떠남이 지금의 자리에서 알 수 없었던 무엇이 그녀의 몸에 배길 것이다. 당장에, 혹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어떤 변화를 깨닫고 설명해야 한다는 조급한 의무 따위는 내팽개치고 그저 누리고 온다면 좋겠다. 순간순간 절로 느껴지는 대로 진실하게 반응하며 그저 삶이라는 긴 여행의 한 부분을 누리고 오면 좋을 것이다. '당위'라는, 누군가나 혹은 무언가를 옭아매 왔을지도 모르는 어떤 생각이란 훌훌 벗어던지고 감정과 감각을 따라 마음껏 즐거움을 찾고 돌아오면 좋을 것이다.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계절을 따라 만물이 변화하듯, 그녀의 이야기에 뭔가 모를 변화가 담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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