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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Sep 13. 2022

<세상이 이상해지지 않으려면>-4

노동과 안식의 세계

    

마이아 뢰브가 수많은 바닥을 닦으며 의문을 던졌다. 1965년 그녀는 묻는다. 1967년에도 묻는다.

그녀는 청소하는 일을 좋아했으나 초과근무까지 하면서도, 몸이 너무 힘들 정도로 일하면서도 일하는 내내 복지국가에서 복지대상자였다. 그녀의 이후 삶을 나는 모른다. 그러니 잘은 몰라도 그녀의 정신이 온전한 동안 끝까지 초과근무까지 해서 청소를 해도 구걸해야 하는 이상한 세계에 관해 물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만이 살아가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가?”(19)

“초과근무까지 해서 청소를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어렵다.”(27)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86)

“고임금 소득자는 점점 더 많이 벌고 저임금소득자는 점점 더 적게 번다. 따라서 상쇄된다.”(115)     


그녀의 생각을 내가 품는다. 그리고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나의 신께 묻는다.

내가 믿는 신, 그분은 노동하시고 안식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나와 우리에게 분배해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처럼 보기에 좋은 것을 창조하기 위해 노동할 권리와 안식할 권리를 지니게 되다.

이 세상은 노동의 세계와 쉼, 안식의 세계로 되어있으며, 노동자 아닌 사람이 없고, 노동하지 않는 존재도, 노동 없는 창조물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노동을 즐겁게 할 수 없다. 노동의 결과가 안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한 세상이다. 지나친 노동이 지구를 위기로 몰아넣기까지 한다. 지나치게 발전한 기술이 인간을 노동 밖으로 몰아낸다. 마이아 에켈뢰브는 수많은 바닥을 닦으며 그 문제를 직면했다. 생각하고 공부했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책을 읽었고 일기를 썼고,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답을 발견하기도 했다. 인간의 소유욕과 권력욕이 답이다. 답을 안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이상해져서 세상이 이상하다고 했다.      

내게도 이상한 게 많다.  일자리가 없는 시대, 정규직이 될 수 없는 시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시대다.

2022년 최저임금 9160원. 8시간 6일 이할 때 주급 439,680원. 월급 1,914,440원. 주거지가 보장되어있다 해도 최저임금으로는 살아가기 힘들지만, 대개 현실은 주거에 들어가는 월세가 있으며, 월세 인상분이 늘 부담이다. 그러나 시급을 더 올리면 안 된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편의점주가 온 가족이 매달려 일해도 아르바이트로 가져가는 임금 이하의 소득을 가져가는 경우가 있다. 치킨집 등 많은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동네에 체인점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걱정스럽다.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민망하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그뿐이 아니다. 동일노동에 동일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동일노동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사람은 과연 상대적 저임금노동자보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가. 일을 잘못하거나, 안 하는 정규직은 철밥통인가 등등.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내게도 헤아리기 시작하면 끝나지 않는 물음들이 넘쳐난다.      


서촌에 있는 표지독서 서점 책방 79-1에서 표지독서를 하다가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전혜원|서해문집)이 눈에 들어왔다. 앞면이 아니라 뒷면이 보이게 진열한 책에서 “숙련 해체의 시대, 소멸하는 일자리와 모멸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한국노동의 아홉 가지 풍경”을 읽으며 표지독서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책을 들어 표지 앞면을 들었다. 붉은빛과 주황, 주홍, 푸른빛 등의 그라데이션으로 된 표지를 깔끔한 서체의 제목을 이루는 커다란 글자가 가득 채웠다.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라데이션은 아홉 가지 색의 조화일 것이라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노동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책을 읽으면서 책의 표지를 생각하면서 깨닫는다.      

전혜원은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온정이 아니라 탐구한다고 했다. 노동과 안식으로 된 이루어진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나와 우리가 온정 아닌 탐구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탐구도 기도의 영역일 수 있다. 아니 기도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기도란 어떤 걸까?     

누군가를 보는 것

무엇인가를 보는 것

본 것들을 품는 것

품으면 하고 싶어지는 것

그것들을 행하는 것     

나는 읽을 때,

쓸 때,

이미 보았던 것들이 더 깊이, 자세히 들여다보인다

때론 의문이 생긴다     

내게는 읽는 게, 쓰는 게 기도다. 묻는 게 기도다

즐겨 하는 노동이 기도다

보는 것이, 알아가는 것이 나로 느껴지면 기도다

때로는 우는 일이 기도다     

누군가는 노래로,

누군가는 그리기로,

누군가는 밭일로,

물질로, 바닥을 청소하고, 더러운 것들을 치우고,

우리가 쓸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로,

파는 일로,

그렇게 먹여 살리는 일로 누군가 기도한다.     

기도가 되려면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힘이 되어주는 일,

편들어주는 일,

나쁜 것을 좋게 바꾸어나가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울어주는 일이 되고,

웃음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어야 한다     


세금이 많다며 정부를 비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정치 않은 수입에 의존하며 세상을 밝히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마이아 에켈뢰브가 살았던 세상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에켈뢰브가 묻고 있을 물음에 나도 힘을 보태 묻는다. 혹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른 사람들이 함께 묻기를, 그래서 나름의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묻는다.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에서 몰랐던 사실들을 읽는다. 마음에 품는다. 그리고 쓴다.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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