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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Oct 23. 2022

특별한 일이 일상을 덮지 못하고 미래보다 오늘이 가깝다

1.  ‘골수이형성증후군’, ‘중증질환 혹은 희귀성 난치병 산정특례제도’

잠에서 깬 게 새벽 4시. 최근 수면습관이 나빠져서 9시 취침하면 1, 2시간 간격으로 깨어 잠들지 못하고 2시가 되어 깨고 나면 더는 잠이 들지 않아 일어나곤 했는데 별일이다. 감정이 가라앉아 있는 게 원인인가? 생각했다.     


4시에 깼지만 6시가 되도록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내방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신앙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성경을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2시간 남짓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건 ‘골수이형성증후군’, ‘중증질환 혹은 희귀성 난치병 산정특례제도’. 그리고 하나님이었다. 구체적인 어떤 것을 생각한 건 아니다.      

지난 9월 29일 남편이 골수 검사를 했고, 어제 10월 6일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가서 들은 말들이었다. ‘(중증질환 혹은 희귀성 난치병)산정특례제도’의 혜택을 입는다니 심각한 것 같긴 한데, 앞으로 남편과 내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 듣는 말,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분명히 읽었고 들었지만 무감각하다.


지난 밤 김ㅇㅇ 선생님께 진단결과를 알리는 카톡을 보냈다.       

“남편 골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단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진단되었고, 유전자검사결과가 나오는 2주 후로 골수이형성증후군 분야 전문의 진료를 예약하고 왔습니다. 그분을 만나 위험도 정도와 치료방법을 의논하게 될 것 같아요. 그와 관련된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인지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고, 남편도 저도 둘 다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아주 잠시. 혹 엘리자베스 퀴블로스가 <죽음과 죽어감>에서 언급한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과정의 첫 단계 부정일까? 생각했지만, 정말 그런 심각성 자체가 없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2주를 더 기다려 결과를 알 때까지 걱정 근심을 유보하려는 성숙한 태도인지 잘 모르겠다. 김ㅇㅇ 선생님께 소식을 알린 것을 보더라도 집히지 않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을 테니. 그야말로 질병에 대한 무지가 주는 평인인 것 같다.

'무지'란 이 정도로 사람을 무감각하게 하는 것일까. 너무 건강해서, 너무 부유해서, 너무 부족한 것이 없는 이들이 약하고 가난하고, 결핍 한가운데 사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게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홍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폴란드 6부작 재난 드라마<하이 워터>를 넷플릭스로 시청했다. 실제로 1997년 중부 유럽 일대를 관통하는 오데르강과 모라바강이 범람해 총 114명이 사망하고 약 6조 4천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폴란드에서는 56명이 사망했고 전체 재산 피해의 77%를 입었다.

 마사지 크림으로 생전 하지 않던 마사지를 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마사지를 오늘과 같은 날에 천연덕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웠다. 고작 9시였다. 11시 33분 잠에서 깨어나 혹 김영래 선생님이 답을 보내오셨을까?, 싶어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쉽지 않은 질병이고 골수에 문제이니 집사님도 염려가 크시겠습니다!! 치료에 지치지 않고 옆에서 잘 지지해주시고 이겨내시고 완치되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질병’, ‘치료에 지치지 않고’라는 내용을 읽고서야 뭔가 감이 잡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마음의 동요 같은 게 없다.      


영화 <하이 워터>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거지요.” ‘자기 마을, 터전을 살릴 것인가?’ ‘자기 마을을 포기하고 사람들과 시설들이 집중된 도시를 구할 것인가?’ 자기 마을을 구하기로 작정하고 결국, 도시를 희생하게 한 시골 마을 주민 한 사람에게 마을 강둑을 폭파해서 도시를 물에 잠기지 않게 하려 한 수문학자가 한 말이다. 그 말이 미니 시리즈를 보는 동안 졸였던 마음을 풀어줬다. 졸였던 내 마음은 바로 ‘저런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묻지만, 도무지 모두가 노력하는 상황에서 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보며 일어나는 불안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거지요.”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최선의 답이었다.      

그렇다. 세상에 유일한 최선이란 없다. 아무도 어떤 게 최선인지 모른다. 다만 현재 자신의 판단에 그것도 마음속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옳게 여겨지는 걸 할 뿐이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던 서로의 노력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연일 현 정권은 지난 정권 때리기에 여념이 없으며, 현재의 모든 어려움이 지난 정권에 책임이 있다고 떠들어 댄다. 그저 현재 현 정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면 될 것을.     


나도 남편도 아직은 잘 모르는 일들로 인해 출렁일 필요는 없다. 있을 수 있는 일을 생각하지만, 오늘은 오늘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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