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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Mar 17. 2023

일상 2023. 3 . 17

새로운 진단, 재생불량성 빈혈



3/17

오늘도 병원데이트 하는 날이다. 장소는 서울대학암병원. 9시 이전 피검사를 하라니 8시가 안 되어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가며 페이스북을 살핀다. 과거의 오늘이 보인다.     

과거의 오늘 (3/17)

"책 한 권의 목적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의 생각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생각이든 당신의 정신이나 마음에 자극을 주기 위해 시작하자마자, 당신은 책을 내려놓을 수 있다. 당신의 명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그다음에 다시 이 책을 집어 들라."_ 토마스 머튼 

마커스. J. 보그의 책,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한국기독교연구소)에 적힌 글이다. (11)    

어떤 앎은 나에게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고 어떤 앎은 내가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린다. 전자는 나를 성장시키고 후자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연신 감탄하며 동시에 이렇게 읊조린다. 

"온통 잘못 알고 살아왔군."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_홍은전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끄는짐승들> (오월의 봄) 중에서(12)    

병원에 도착했다. 

9시 피검사. 11시 30분은 진료. 그사이 피검사를 위해 건너뛴 아침 식사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맛이 괜찮다. 커피를 마시며, 남편이 금빛봉투를 꺼내며 씨~익 웃는다. 치과 치료비로 여유가 없는 나 대신 자기가 챙긴다고 한, 딸 생일 축하비 봉투다. 오늘은 딸 생일이기도 하다. 진료를 마친 후, 딸네 집으로 갈 예정이다.

봉투를 열고 신권 5만 원짜리 4장과 함께, 봉투를 준비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메모지가 끌려 나왔다. 

"ㆍㆍㆍ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라. 힘들지만 보람있고 행복하단다." _엄마 아빠가.

"난 아닌데."

"허허 엄마라는 사람이 저래가지고~ 힘들어도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ㆍㆍㆍ"

핀잔을 들었다.

"아무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면서도 그런 성의를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지."

으쓱거리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그냥 놔둘 리 없다.

"근데 모자라기도 하지"

"응. 나는 모자라지. 세상에 모자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지. 그런데 당신은 그 모자라는 점이 중요하고 심각하지."

그렇게 주고받으며 웃다가 일어나 다시 병원을 향한다. 그때 갑자기 불안하고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만일에~'

너무 오랫동안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그건 지닌 번 진단이 오진이라는, 그러니까 남편에게는 이상이 없다는 시그널 아닐까 했다. 그런데, 진료 30분을 남기고 불안함이 급히 찾아왔다.

뭣 때문에 불안한 걸까? 의사를 마주하는 그 상황, 혹 좋지 않은 결과 앞에서 일어날 수 있누 남편의 심정?, 어쩌면 나 혼자 살아갈 일?

혹시, 치료가 쉽지 않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시간이 되고 남편 이름이 호명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생불량성빈혈로 경증인 것 같습니다. 골수의 기능이 저하된 거지요. 자가면역질환인데, 일단 비타민들을 처방할 테니 드시고, 두달 후에 뵙는 걸로 하지요."

"혈액암은 아닌 건가요?"

"네. 암은 아닙니다."

"그럼 중대한 건 아닌 거지요?"

"글쎄요. 그건 상태에 따라 두고 보겠습니다."    

남편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해왔지만 실은 그렇지만은 아니었나 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워진 듯했다. 4월 23일로 예정된 여행을 편히 갔다 올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럴지도 않았다며”

“그럴 리가 있나. 사실 입원이라도 하라고 하면 여행을 갈 수 없는 거잖아”    

“엄마 아빠 4월 23일 유럽 여행 간다.”

“와~ 드디어 가는구나.”

“응. 어떻게 긴 비행시간을 견디려고 하냐고 물어봐.”

“왜?”

“비즈니스 타고 간다.”

“엄마만? 업그레이드?”

“아니. 아빠도. 아예 비즈니스석 상품이야.”

“와. 잘했다.”    

예정된 여행 이야기도 했다. 4월이 기다려진다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미 들떠 있었다. 

이미 간단히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유투브를 검색했다. 나 혼자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병의 당사자도 알아야 하기에, 함께 시청하기로 했다.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질병이다. 골수이형성증후군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뭐가 다른가?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조혈모세포의 돌연변이라면, 재생불량성빈혈은 세포의 충실성이 빈약한 것으로 서로 다른 것일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효과적인 치료 약이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골수이식은 너무 힘든 일이라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재생불량성빈혈의 경우 대체로는 50세 이하만 공수이식치료를 한다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골수이식이 필요한 정도에 간다 해도 포그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먼저 병원의 진단,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오진이 거의 확실한 것 같고, 그나마 효과적인 치료제가 있는 듯하니 조금 나은 상황이 되었으나 사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 진작부터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혹 지난날의 아픔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남은 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한 터였고, 오늘도 그리 살아보자고, 다시 다짐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거운, 그러나 크게 힘들지는 않은 돌을 가슴에 얹고 누워있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늘 그럴 것이다. 그러나 외치자. “아모르 파티!”    

하필이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황시운, 교유서가)를 읽고 있다. 고작 나같은 사람을 누나로 불러주는 이동식 상봉몰 대표님이 자신이 읽은 후 보내준 책이다. 보내주신 지가 좀 되었는데 어제부터 읽고 있다. 작가 황시운이 겪는 일에 비하면 나와 남편 앞에 펼쳐진 일은 그야말로 가볍다. 창비 ‘장편소설상’을 받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진 바로 그해 추락사고로 추락한 삶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삶.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마비와 함께 실체 없는 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을 읽으며, 다만 신체장애만이 아닌, 아무리 애써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비롯한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이들의 다양한 장애 앞에서 나와 남편은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얼마 전 장일호 작가가 말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고 한다. 죽으려면 암이 낫다. 왜냐면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남편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 일들로 인해 나의 명상을 시작했으며, 내가 알아 온 어떤 앎과 내가 쌓아온 어떤 세계를 무너뜨리는 대신,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이며,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세계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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