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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Mar 27. 2023

일상  3월 27일

종교

어제 책 읽는 모임에 갔다 왔다. 내게 책 읽는 모임이 두 개 있다. 각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음이 두 모임의 공통점이라면, 다른 점은 읽는 책의 계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 모임은 그리 제한한 적은 없지만, 구성원이 다 기독교인(교회를 떠났거나 교회에 매우 회의적인)이고 읽는 책이 인문학이다. 이들의 생각은 교회 안에, 신학 안에 갇힌 하나님과 예수를 더 넓은 세상 안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류 교회에서 다뤄지지 않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논한다. 음식, 건강, 자연, 동식물, 기후, 생명, 종교, 제도, 차별, 교회, 권력 등등 소재가 다양하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논한다. 한결같이 부족한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다 보면, 몰랐던 걸 알게 되고, 무지했던 영역으로 관심이 옮겨간다.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걸 느낀다. 또 다른 모임은 목사와 신부로 구성되고 신학과 종교, 자연과학, 사회과학 관련 책을 읽는다. 이리도 마음 놓고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모임, 특히나 목사와 신부의 모임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내게는 그야말로 아무런 자격도 없이 누리게 된 행운이다. 늦게 참여한 나는 읽은 책도 그분들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적다. 그 안에는 자신이 소속한 교단 안에서 힘들여가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으나,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내 경우, 책을 읽어서? 그래서? 그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물으며 회의적이곤 하다. 나는 별 방법이 없다. 고작 적은 금액이지만, 차별받는 자들을 위해 후원하는 것, 그런 영역이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것 외에 그저 책을 읽고, 내가 변화되어 가듯, 누군가도 이제까지 듣던 것과는 달리 내가 책으로 한 경험을 나눌 수 있을까? 외에 다른 삶이 없고,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달리 뭔가를 더 할 에너지가 없다. 솔직히 그게 가장 쉬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래서 앞으로도, 어떤 이에게는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비칠지라도 내가 경험한 것을 글과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내 생각과 경험조차 지속해서 변한다는 게 중요하다. 세계가, 모든 영역에서 그리 변해왔듯이.     

“제가 읽은 문학에서는 때로 무당이 오히려 살기 힘든 민중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요.”

“조선 시대 유자들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듯 좋은 무당과 악한 무당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좋지 못한 무당처럼 행하는 기독교의 목사가 적지 않지요.”

“주변에 의도치 않았는데 불가항력적으로 신병을 앓은 분들이 있어요. 무당까지는 되지 않았어도 점을 봐준 경험을 가진 걸로 알고 있어요. 최근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조차, 무당이 빙의하는 현상도 있잖아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솔직히 저는 오직 기독교만이 우리의 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불교,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와 일부 무속 안에 우리가 믿는 신의 모습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 중 어느 하나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유일한 종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그래요.”

“그래요?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우리를 범신론자 아니냐고 비판하겠지요?”

“우리는 사실 범신론자가 아니지요. 범재신론자라 할 수 있겠지요.”

“아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라는 말을 하셨지요? 그렇다면 과연 예수가 재림하시는 건 맞습니까?”

“사실 모르지요.”

“와. 우리 이런 것까지 이리 솔직하게 나눠도 되는 거네요. 이렇게 편하다니요.”     

<무당과 유생의 대결>(한승훈, 사우)을 읽은 후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저자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이 ‘유교화’라는 말의 의미를 종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사상적·제도적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을 개조하는 종교개혁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급진적인 성상 파괴의 실천으로 보았다고 한다. 실제 고려시대까지 금속으로 만들어졌던 왕의 상이 땅에 묻혔고, 산신과 성황신은 그 개성과 인격성을 박탈당한 채 나무 위패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16세기에 이르자 열정에 불타는 유생들이 불상을 파괴하고 신당을 불태웠으며, 신상을 부수어 내다 버렸고, 유교 자신의 가장 신성한 대상인 공자상의 철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252) 저자는 그럼에도 유교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교가 종교로서의 생명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면, 반면 불교와 무속은 근현대까지 살아남았고 여전히 살아남았다. 공식종교에 대한 장악과 민속 종교의 경합에서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되었던 유교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흔히 한국의 종교문화는 ‘유교적’인 권위주의와 ‘무속적’인 기복주의로 서술되곤 한다. 가부장적인 문화는 유교탓이고, 종교인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몰두하는 것은 무속의 영향이라는 식이다. 실제로는 인과관계가 거꾸로 되어있다. 공식종교의 무대를 정복한 엘리트 전통은 권력으로 문화를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고 거기에 유교라는 라벨을 붙였다. 민속 종교의 무대에서 다른 토착적 의례를 박탈당한 대중이 일상적으로 복을 빌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속이었다. 불교, 기독교 등 현대 한국의 제도종교에서 ‘유교적’인 권위주의나 ‘무속적’인 기복주의가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엣 전텅의 잔재 같은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은 종교를 통해 질서 집힌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하는가 하면, 풍요와 행복이 가득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조선의 유교화 상황에서 일어나 무당과 유생의 대결은 그런 욕망들을 둘러싼 역동적인 과정이었다.”(254)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은 이렇다. 특히나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은 그야말로 긴 지구의 역사에 어느 순간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종교는 수없이 발생했다가 어느 순간 발생해 주류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가 그 자리를 다른 종교에 물려준다. 결국, 그 세가 영원한 종교는 없다. 그러나 일단 발생한 종교는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한 시대 중요한 자리를 누리다가 다른 종교에 그 자리를 물려주는 다양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동시대에 존재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미래에 대한 불안 앞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풍요와 행복이 가득한 삶을 누리려 하는 당연한 욕망의 결과다. 그 욕망으로 보이지 않는 초월을 만나려 애쓰는 가운데 만난 초월의 다양한 모습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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