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Mar 29. 2023

일상  3. 29

고통

3/29

가끔은, 아니 자주, 하나님과 너무 멀어진 건 아닐까 나는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자주 불안해하며 염려한다. 한동안 계속 그래왔으며 오늘도 그렇다. 그래도 아직은 어두운 시간 책상에 앉는다. 그저 하나님을 부르며. 분명 그분 앞에 있는데, 그분이 내 앞에 있는지 느낄 수 없다.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느꼈던 시간이 그렇지 못했던 시간보다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갈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지.

문득 생각했다. 가난한 자와 함께 있을 때, 그분을 만날 수 있다고 한 어느 분의 말을. 돌이켜보면 그 말이 사실이다. 나는 비록 그분처럼 가난한 이들과 엉겨 살지 못하지만, 책이나 영화로 오늘날 세상의 비참함을 만나고, 나의 사람 되지 못함을 만나고 아파할 때 그분 앞에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작년 말 <슬픔의 방문>(장일호/낮은산)을 읽고 호모북커스가 저자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을 때, 거기 참석한 누군가가 자신은 슬픔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왜일까? 세상이 슬픈데, 나 역시 슬퍼야 이치에 맞아 그렇고, 그래서 슬픈 게 내게는 편하고 자연스러운 걸 테다. ‘나는 가짜야. 가짜 같아’ 슬픔을 모르는 날이 지속할 때 내가 느끼는 생각과 감정이다. 다만 그 슬픔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문제로 남지만 말이다.


오늘은 문득, 아니 문득이 아니다. 수시로 무시로 찾아오는 생각이다. 일해서 받는 보상으로는 도무지 집을 가질 수 없는 상황, 단지 소유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거주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게 한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으니 정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다 어제 받은 책 <바람이 되어 살아낼께>(유가영/다른)이 눈에 보인다. 세월호 생존 학생이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이 글이 되어 나온 것이다. 얼마 전 호모북커스 김성수 목사님이 펀딩 소식을 알려줬고, 펀딩한 책이 온 것. 책을 펼쳤다.


“한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 적이 있어요. 그 시절의 우리는 참사의 당사자였지만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세상이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세상은 시련을 겪은 누군가가 그걸 훌륭하게 극복해내야, 그제야 그 사람을 바라봐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박수를 받는다고요.”


신체적 장애던 정신적 장애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세상이 아니다. 오늘 세상은 그리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유가영의 말처럼, 장애인과 장애의 고통을 소비한다. 이용한다. 그들이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을 했을 때,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모든 장애인에게 그렇게 하기를 종용함으로 장애를 갖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각 사람 개인의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긴다. 오늘 국가가 권력이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들의 운동을 처벌하는 식으로, 개인들이 그 파별과 혐오에 동참하게끔 유도함으로 그들의 고통을 최대치로 키우는 게 현실이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읽어가고 있는 책,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정한옥, 정은문고)에서 읽은 고통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손봉호 교수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려는 성향보다 고통을 피하려는 욕구가 훨씬 강하며, 따라서 한 공동체의 윤리적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가장 적은 사람이 고통받는 ‘최소 고통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단다”(107)


“그러니 저 역시 저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보란 듯이 이겨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때까지의 저희 삶을, 우리가 견뎌내는 고통을 세상이 알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아둥바둥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저는 단지 좀 더 불운한 일을 겪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평생에 남을 상처를, 평범한 제가 어떻게 완전히 극복해낼 수가 있겠어요. 그걸 깨닫게 되자 세상에서 원망스러웠습니다. ‘이대로라면 내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텐데, 나는 그때 그대로 불쌍하고 안됐고 힘들어하는 아이로 남는 걸까?’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사고가 있고 1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 지금 저는 20대 성인이 되었어요. 그동안 여러 일을 겪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상’이 나의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아도 좋아. 중요한 건 나니까. ‘세상에 몰라준대도 나는 알아. 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나는 그런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활동하던 비영리단체 ‘운디드 힐러’에 출판 제의가 들어왔어요. 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옛날처럼 세상이 나의 목소리를 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때문은 아니었어요. 그저 지금의 아이들이 알았으면 했어요. 불과 얼마 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일을 겪은 아이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사는지, 또 혹시라도 그때의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있다면 제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지만 책을 쓰기로 결정했어요.”


불과 얼마 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일을 겪은 아이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사는지, 또 혹시라도 그때의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누군가를 위해 이 글을 썼다니.



“(...) 고통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을 깨우는 가장 효과적인 각성제라는 거,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야말로 한 사람의 성숙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표지라는 것이야.” (정한옥. 110)

“위르겐 몰트만은 (....)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할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역설한단다.” (정한옥. 113)

“수전 손택은 (...) 타인의 고통이 우리가 누리는 특권과 연결되어있지는 않은지 깊이 숙고하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지.”(정한옥. 113)


스스로 고통을 당하심으로 고통받는 이의 편에 서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 땅의 주류 기독교가 고통당하는 자의 편에 서지 않거나 무심한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세대가 이만큼 자랐는데도 아직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사람들은 모르는 걸까요. 이런 일들을 계속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그다음 차례는 자신과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그걸 막기 위해 왜 남겨진 사람들만 몸부림쳐야 하는 걸까요. 저는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다음 세대인 아이들도, 더 성장해 나갈 저의 세대 사람들도 우리 앞에 벌어지는 참사에 두 눈 뜨고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거예요. 남겨진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부디 관심을 거두지 않기를, 생각을 멈추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나니, 어떤 분들처럼 하나님을 만나며 은혜에 잠겼을 어떤 분들을 생각하며 나는 그렇지 못해 불안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되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 3/2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