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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Jun 21. 2023

<레미제라블> 읽기 2  요약버전

2. “불행은 인간으로 하여금 추락과 상승을 거듭하게 하며, 지성을 길러

“확실히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행은 인간의 지성을 길러준다.”(202)




지성이란 무엇인가? 미리엘이 G의원에게 말했던 양심일까? G의원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양심이란 우리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타고난 학문의 양이다.”) 그렇다면 미리엘의 지성, 고귀한 양심도 과연 불행에서 비롯된 것일까? 잘은 모르지만 그도 확실히 불행을 경험했으며 그 안에서 추락했고 또 상승했다. 그렇다면 장발장에게 닥친 불행은 과연 그의 지성을 길러줬을까? 그는 과연 추락했는데 다시 상승할 수 있을까? 불행을 만나 길러질 수 있는 지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미리엘의 불행은, 프랑스대혁명과 망명, 1793년의 악몽, 가난이었다.”(148)


미리엘은 분명 불행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잘은 모르겠으나 젊은 시절 그에 대한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금, 자비와 연민의 사람, 그리고 복음적인 사람이다. 동생과 하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그에게 그가 사는 집은 그가 가짐 모든 것은 고통받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것이다. (144)


그에게 장발장은 피신처가 필요한 사람, 고통받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주교가 사는 주교관과 그곳의 물건은 바로 장발장의 것이었다. 미리엘에게 장발장이 얼마든지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점이 주교 미리엘의 지성이었다.




장발장의 불행. 끔찍한 십구 년의 감옥생활은 그의 지성을 길렀다.


그는 무지한 사람이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타고난 빛이 그의 마음속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도둑질에 대해 결백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생각했다. 만약에 달라고 했다면 아마 그 빵을 거절하지는 않았으리라. 동정심에서든, 일을 해서든, 어쨌든 그 빵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았으리라. “굶주리는 판에 기다릴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건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없다. 먼저 글자 그대로 굶어 죽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다음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죽지 않고 오래오래 그리고 수없이 참아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므로 참을성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는 옳지 않았다. 그는 다른 생각도 했다.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한 것은 자기 한 사람에게만 있었는가? 먼저, 노동자인 그에게 일자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그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니던가? 징벌이 가혹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던가? 범죄인 쪽에서 범행이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도, 법률 쪽에서 형벌이 더 많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던가? 탈옥 기도로 계속 가중된 그 형벌은 결국 최약자에 대한 최강자에 폭행 같은 것이 되고, 개인에 대한 사회의 죄악이 되고, 매일 되풀이되는 죄악이고, 십구 년간 계속된 죄악이 되지 않았던가? 과연 인간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경우에는 부조리한 무분별을, 어떤 경우에는 무자비한 경계를 모두 똑같이 받아들이게 하고, 결핍과 과다 사이에 노동의 결핍과 징벌을 과다 사이에 한 가련한 인간을 영원히 붙잡아 놓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162, 163), “그는 자기가 받은 처벌은 사실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불공정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164) “우연히 이루어지는 재산 분배에서 가장 적은 몫을 탄, 따라서 가장 배려를 받아 마땅한 구성원들을 사회가 그렇게 대응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해결되었으면. 그는 사회를 판결하여 유죄선고를 했다. 그는 자신의 증오심으로 사회를 처벌했다.” (164)


사실, 파브롤의 가치 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일곱 명의 어린아이를 먹이기 위해 빵을 훔친 일로, 목에 쇠사슬을 차야 했을까? 그로 인해 그의 과거가 깡그리 무시되고, 이름조차 지워지고, 24601호가 되어야 했을까? 누나는? 그의 어린 조카들은? 살아남은 그 불쌍한 사람들을 누가 생각이나 할까?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라고? 그가 19년 동안 번 돈은 109프랑 15수였다. (141) 주교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교가 받는 기본 수입은 1년 15000프랑. 장발장의 년 수익의 2614배인 것이다. 때는 워털루 전쟁 패전 이후 혼돈과 갈등이 나라를 감도는 1815년. 비로소 자유를 그리며 나온 장발장은 공손했다. 그는 증오를 품고 나왔지만, 지성이 있었고, 그에게는 여전히 영혼의 빛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 그를 되살릴 것인가?


“인류 사회의 냉혹한 진행이여!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인간과 영혼의 상실이여! 법률이 떨어뜨리는 모든 것이 떨어지는 바다여! 구원의 서글픈 소멸이여! 오, 정신적 죽음이여! 바다, 그것은 형벌이 벌 받은 자를 던지는 사회의 가혹한 밤이다. 그것은 엄청난 비참함이다. 영혼이 이 심연 속에 흘러들면 시체가 될 수 있다. 누가 그것을 되살릴 것인가?”(176)




누가, 무엇이 그를 되살릴 것인가? 친절한 아주머니, R 후작 부인과 미리엘 주교.


부인은 나그네가 돈이 없어 여관에 가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자신에게 있는 4수를 건넸을 뿐 아니라, 주교가 사는, 주교관 아닌 실제 주교가 사는 집을 알려줬다. 이 사소할지 모르는 이 아름다운 일이, 장발장을 미리엘 주교에게 인도했다. 이 일이 어떤 일을 만들어내는가? 부인 자신은 알지 못한 채. 그리고 그는 주교 미리엘을 만났다. “그대에게 숙소를 달라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마라.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 거북한 자야말로 특히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49) 라고 주교는 말했는데, 장발장이 바로 그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장발장은 주교의 ‘노형’이 되었고. 불을 쬐었고, 함께 저녁밥을 먹었고, 흰 침대보를 깐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주교는 그에게 빛이었고 그 빛은 하늘로부터 온 양심이었다. 그 빛이 장발장을 되돌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악행을 저지르고 만다. 불쌍한 사부아 소년, 푸티베르제의 돈을 빼앗다니. 그러나 이 마지막 악이 그의 지상 속에 있던 혼돈을 갑자기 뚫고 들어가 그것을 없애 버렸다. (204)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다는 로마서 15장 20절 21절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빛은 그 불쌍한 아이들을 더 불쌍하게 하면서, 드러나는가? 불행이 인간의 지성을 길러준다면, 그 사부아 소년에게도 지성을 길러지기를.




빅토르 위고의 불행이, 그리고 그로 인해 길러진 지성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위고는 1802년 아주 약하게 출생했다. 강하고 지혜로운 엄마와 소통이 안 되며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와의 갈등, 그 싸우는 소리 안에서 성장했다. 왕당파인 엄마, 대부 라오리, 인지했던 수도원 교사, 라비에르의 영향을 받았다. 1815년 당시, 그는 샤토브리앙처럼 과격한 왕당파였다. 나폴레옹과 아버지 레오플을 매우 경멸했다. 나폴레옹의 실패를 환호했다. 나중에서야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다른 일면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치 미리엘 주교가 국민의회 의원 G를 만났듯! 어린 시절 불쌍하게 죽어가는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고 잊히지 않았다. 그의 행동하기로 했다. 위고는 이미 12세에 말에는 사람을 키우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끔찍한 기숙 학교에서 친절한 사람, 조교였고 펠릭스 비스카라를 만났다. 그래서 숨 쉴 수 있었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 친절한 후작 부인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미리엘, 장발장, 위고는 함께 불행을 겪었고 그 안에서 지성을 키웠으며,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소실될 수 있는 빛이 있다. 불행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아니 도리어 불행 속에서 피어나는.


그리고 또 한 여자, 이제는 그 여자 팡틴이  불행의 늪으로 빠져든다. 깊은 불행의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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