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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Oct 26. 2023

10월 24일

키에르케고어를 읽으면서 이어지는 생각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일! 바로 인간의 문제와 신앙의 정수가 그 안에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 간의 문제. 이삭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잘못된 사랑? 그건 애초부터 인간과 세상 문제의 본질인 듯하다. 더 올라가 아담과 하와의 문제이기도 한 것. ‘장애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아들들’임을 인정하고, ‘자기를 거부하려는 뿌리 깊은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는 나우웬의 깨달음(물론 나우웬의 이 책은, 여기에 중점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붙잡은 한 문장일 뿐). 누구나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새로운 각성으로만 깨닫는 진리! '혐오와 배제가 없는 사랑'


아담은 자신의 자유로운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부정하므로 다른 욕심을 가지고 선악과를 원했으며, 아브라함 역시, 있는 그대로의 이삭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약속으로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두 경우 다 하나님을 바라며, 그렇기에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 것!

이런 역사가 계속된다. 이삭 역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편애하며 인간 대부분이 연인, 자녀, 가족, 타인을 향한 편애와 배제, 혐오 가운데 살아간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 외의 뭇 생물은 어떠한가. 사람들을 넘어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아니던가. ‘하느님이 만드시고, 있는 그대로 보기에 좋은 모든 피조물’ 그것들의 존재를 인간은 얼마든지 가벼이 여기고 착취함으로써, 하느님이 만드신 본래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잘못된 사랑! 혐오와 배제!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도약이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신앙의 도약이 필요하다.




키에르케고어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말해주는지~

키에르케고어는 그동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교회에서 전해주는 대로 어거지로 받아들이거나 모르는 채로 놔둬야 하는 이 일,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 이 명령을 듣고 실제로 이삭을 하느님께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이토록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삭이 약속된 아들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가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삭 덕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받은 이 선물은 두 가지 위험을 초래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도 전에 이미 그를 하느님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이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삭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49)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투사함으로써 이삭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54) 둘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희망과 꿈을 올곧이 하느님께 두기보다는 도리어 이삭에 두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관계를 방해한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은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교정하는가? 하느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신앙의 도약을 행하게 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이 그러하시듯 영원한 것의 매개를 거쳐 이삭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분리에 의한 관계다. 이는 하느님과 근원적인 관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개인(단독자)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또한 가장 근원적인 통합에 의한 관계이기도 하다. (<쇠얀 키에르케고어>(매튜 D.커크패트릭

비아) 50)  

키에르케고어가 외톨이, 단독자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톨이’(개인)란, 종교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이 시대가 … 전 인류가 바느시 통과해야만 하는 범주다. 나의 과제는 비천한 하인으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외톨이’라는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선동하는 일이다. 아무도 외톨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 골짜기를 통과할 수 없다.” <관점> 중(<쇠얀 키에르케고어>에서 재인용)




오후에 레미제라블 읽고 쓰기 14번째 모임이 있었다. 급체인지 그 외의 다른 문제도 있는지 어지럼증으로 고생해서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김ㅇ주 선생님이 모임에 나왔다.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친밀해져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이 모임이 풍성하고 좋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 이미 한 번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이 진했는데, 여럿이 모여 읽으니, 단순 감동이 아니라 많은 문제를 생각하고 나누게 된다. 처음 가졌던 감동에 더해, 이 진지한 낭만주의 소설의 성격에 대해, 저자에 대한, 찬사와 함께 허점(편견)도 조금은 알아가게 된다. 사실주의 소설가의 이 소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 소설의 어떤 번역가의 소설 속, 장발장과 자베르에 대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평가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제는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도저히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주제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공하는 이 대단한 책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빅토르 위고의 인류애를. 자신의 생애를 건 이 노력을.

책을 끝까지 읽은 후, 뭔가 정리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내용을 정리해야 하지 않나 싶다. 모임에서 강ㅇ석 기자님이 <바울, 마케도니아게 가다>(정은찬

Ivp)를 내게 줬다. 내가 먼저 빌려주기를 청했으나 선물로 줬다.




S 언니 집에서 풍성한 식탁을 대접받은 후, 또 속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최근 식습관이 무너진 것 같아, 다시 소식의 바른 식습관을 다짐한다.

‘오일풀링’을 시작한 지 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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