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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Oct 29. 2023

10월 29일

10월 29일에 읽는 창세기


오늘은 손자 의 생일잔치가 있는 날. 원래 생일은 10월 31일, 바로 할로윈데이. 딱 1년 전, 2022년 10월 29일은 31일의 할로윈데이 잔치를 즐기기 위해 모였던 날이다. 젊은이들은 이날 이태원에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내 딸들과 사위가 조금 더 어렸거나, 우리 손자들이 조금 더 컸더라면, 우리 아이들도 잔치를 즐기려고 이테원에 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작년 그날 일이 터지자마자, 우리 작은딸이 혹 그곳에 가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했으니 말이다. 운이 좋게(?) 피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 누구에게도 바로 나와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충분히 예상되는 혼잡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어난 일, 몇 차례의 신고가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없었던 그 날 결국 벌어진 참사. 159명의 삶이 끝났다. 더 많은 사람의 삶이 고통 속에 있다. 그런 마당에 젊은이들을 행해 왜 그런데 놀러 갔냐고 오히려 질책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고, 이런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누군가를 옹호한다. 상인들과 갑자기 어떤 훈련도 받은 바 없이 갑자기 현장에서 부상자를 돕고 시신을 수습했던 공무원들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인데, 진상조사도 이루어진 바 없고, 단 한 명도 책임지지 않은 대참사였다. 오늘도 유가족들이,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진상조사를 요구한다. 그러나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그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들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래 글을 읽고 나니,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며, 과거 어떤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과오를 가볍게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그 어떤 사람도.




가끔 책을 손에 잡으면서 우연이 아닌, 어떤 은총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사놓은 지 한참 된,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랍비 조너선 섹스

한국기독교연구소)를 이제야 펼쳤다. 한국기독교연구소가 낸 책들을 좋아한다. 깊은 통찰을 담은 책들이 그곳에서 나온다. 이번 책도 그렇다. 과연 ‘성서심층연구 시리즈 03’! 마음을 건드리는 많은 책이 나오고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착한 보통 사람들이 가끔은 특수한 사건 앞에서 잔인해지곤 하는 한다.  사랑과 정의가 한쌍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마음을 찢기보다 우리의 앎을 찢고 확장하는 책들이 결국은 우리의 열광하는 마음을 지속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놓칠 수 없는 내용을 되는대로 적어 옮겨야겠다. 내 안에 이 생각이 오래 자리 잡고 내 삶의 방향을 만들어가기를, 계속해서 나를 지금보다 나은 쪽으로 만들어가게 되기를!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15세기 피코델라 미란돌라가 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연설>은 서구 문명의 전환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인간에게 말한 선언’을 다음과 같이 풀어썼다고, 랍비 조너선 섹스는 알려준다. (34)


““땅의 티끌”과 하나님의 호흡의 독특한 합성인 호모 사피엔스는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점에서, 즉 자신이 선택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피조물 사이에서 독특하다. 미란돌라의  <연설>은 중세의 두 가지 지배적인 전통과의 단절이었다. 즉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원죄로 오염되었다는 기독교 교리의 단절이며, 인류는 고정된 형태에 묶여있다는 플라톤 사상과의 단절이었다.” (35)


“오 아담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그대의 고유한 재능도 적절하게 부여하지 않았다오. 이는 어떤 장소, 어떤 형태, 어떤 재능이든지 사전숙고와 선택, 그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통해 그대가 가질 수도 있고 그대가 소유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오. (…) 그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가 그대에게 맡긴 보호를 통해, 그대 자신의 본성의 윤곽을 스스로 추적할 수 있다오. (…) 우리는 그대를 하늘이나 땅에 속하지 않고, 죽지도 않고 볼명도 아닌 피조물로 만들었다오.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고 자랑스럽게 형성하는 자로서, 그대가 선호하는 형태로 자신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오. 더 낮고 야만적인 삶의 형태로 내려가는 것은 그대의 능력에 달려있게 될 것이라오. 그대 자신의 결정을 통해, 살이 신성한 상위의 위계로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오.”(34, 5)


유대교가 세상에 소개한 사상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사람이 스스로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교가 세상에 소개한 것이 바로 이 사상이다.” _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 <할라카 인간>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에서 재인용)


“토라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하나님은 모든 표현, 모든 범주를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될 것이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 (…) 하나님은 한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형상”은 특별한 형태를 소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창세기 1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자연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으로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자유를 주셨고, 그리하여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다.”(36)


“토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이며,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가장 운명적인 선물이다.”(37)


인간의 드라마는 비극으로 전개된다. 창세기의 전개가 그렇고, 우리가 아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곳곳에 비극이 있다. 그럼에도 랍비, 조너선 섹스가 한 묻는 다음 말에서 우리는, 당연히 모두에게는 아닐, 희망을 품는다.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시고 인간은 혼돈을 창조한다. 어느 것이 우세할 것인가?”(29)


이리도 진지한 글을 읽다가 갑자기, 그것도 채널을 돌리며 어쩌다 스친 드라마 <강남순>을 떠올렸다. “사람은 바꿔서 쓸 수 없어.” “아니, 우리 엄마는 사람을 바꿔서 쓸 수 있다고 했어. 나도 그 말을 믿어볼래.” 낭만적인 드라마인 듯하다. 며칠 내로 그 드라마를 정주행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물 위의 천사들>(Angels Over the Net)은 박명준 대표가 알려주신 유투브로 볼 수 있었다. 나는 확실히 뒤진 사람이고, 내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열심히 알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 헨리 나우웬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젊고 활달했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모른다. 공중그네 곡예는 실제로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공중그네 곡예사들이, 나는 사람과 잡는 사람이, 헨리가 만나고 마침내는 로드레이 공중그네곡예팀이 깨달은 바를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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