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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Oct 27. 2023

헨리 나우웬이 이르고 싶었던 자유에 관한 이야기

완전한  자유에 눈뜨는 뜻밖의 이야기

#날다떨어지다붙잡다

#바람이불어오는곳

#헨리나우웬

#캐럴린휘트니브라운

#완전한자유에눈뜨는뜻밖의이야기


10월 21일부터 전말 선물로 받은 <날다, 떨어지다, 붙잡다>(헨리 나우웨·캐럴린 휘트니브라운

바람이불어오는곳)를 읽기 시작해 일주일 동안 천천히 읽어 오늘 이른 아침에 비로소 다 읽었다.


“혹시 내가 죽거든 모든 사람에게 내가 감사하더라고 전해주십시오. 나는 너무도 감사합니다.”(313)


헨리가 죽기 전, 그의 친구를 보며 부탁한 말이다. 이는 내가 혹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이에게, 얼굴 본 적 없고 그렇기에 전혀 알 수 없는 이들에게까지 해야 할,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한때 내가 불편하게 여겼거나, 좋지 않게 여겼던 모든 이들에게까지. 비록 보이지 않아도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는 연결되어있고 좋은 일이건 그렇지 못한 일이건, 그 모든 일이 나를 만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감사보다 미안한 일이 더 많다. 내가 그 슬픔과 억울함을 듣고 알기에 응당 움직였어야 할 현장에 가지 않은 것!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그에 대한, 즉 몸으로 움직이지 못했음에 대해 용서해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헨리의 1986년 3월 20일 목요일 일기와 언제 쓴 것인지 모르는 또 하나의 일기를 떠올린다.


1986년 3월 20일 목요일

“지금까지 내 삶은 온통 말 중심이었다. 배우고 가르치고 읽고 쓰고 말하는 삶, 말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라르쉬의 기초는 말이 아니라 몸이다. 먹이고 씻기고 만지고 붙들어야 공동체가 세워진다. 말은 부수적이다. 대다수 장애인은 거의 말이 없으며,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몸의 언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우리 앞에 내놓으시는 말씀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피부로 느껴진다. 이렇듯 몸은 말씀을 알고 말씀과 관계를 맺는 길이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이 못내 꺼려진다.” (276)


그리고 또 어느 날의 일기


“삶이란 위태로운 균형입니다. 가끔 균형을 잃을 때면 저는 글쓰기 덕분에 균형을 되찾지요.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그냥 글로 쓰고 싶어요. 그러면 결국 저 자신의 고뇌를 더 잘 알게 됩니다.”(305)


 그렇다. 말과 글 뿐 아니라 실제 몸으로 살아내며 있어야 할 곳에 갔던 헨리 나우웬과 같을 수는 없으나, 나 역시 이 두 부분에 있어 헨리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첫째는 내가 하는 말과 글이 삶이 따르지 않는 거짓이라는 느낌. 많은 사람에 대한 부채감이다. 그러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헨리가 기록했듯,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글로 쓰면서 나의 고뇌의 실체를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두 부분만으로도 나는 이 책에 충분히 감사하다. 그러나 이 책을 그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고 책과 두 저자, 헨리 나우웬과 캐멀런휘트니스브라운, 헨리가 그렇게도 이르고 싶었던, 자신들도 몰랐으나 헨리에게 ‘육화된 영성’을 몸으로 보여주고 헨리가 그 앞에서 눈으로 깨닫게 해준 로드리고 공중그네곡예단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날다, 떨어지다, 붙잡다>를 편하게 읽기 시작했다.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내용은 평범하지도 얕지도 않다는 것을 예감했다. 나우웬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가 쓴 책을 세 권 정도 읽었다. 좋은 책들이지만 내게 끌리는 책들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왜 그렇게 나우웬을 좋아하는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그의 다른 책들을 읽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헨리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는 1995년 9월 8일 일기에 이런 글을 썼다.


“지난 25년간 나는 많은 에세이와 깨달음과 묵상을 집필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써본 일은 거의 없다. 왜일까? 나 자신의 도독적 성향 때문에 부득이 일상생활의 모호한 현실보다는 바를 메시지를 전하는데 더 사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바른 메시지란 일상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새 생명이 태동하는 습지에 발을 디디기가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끝이 열려 있는 이야기와 여파가 불안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253)


아마도 올 초 추운 겨울, 바람이불어오는곳 박명준 대표님으로부터 헨리 나우웬의 유작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유명한 이의 다른 책들을 읽지 못했으니 유작으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책이 나왔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수입이 없는 사람으로 도서비를 줄여야 하겠고, 이미 집에 쌓여있는 책들도 어느 정도 익은 다음 천천히 주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좋은 평이 쏟아져 나오자 마음이 급해졌고 애써 주문을 미루는 마당에 박명준 대표님이 선물로 주시는 바람에, ‘책은 사 읽어야 하는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민망하게 넙죽 받아들었다. 책이 너무 예쁘게 만들어져, ‘책 한 권이 예술이구나’ 생각하면서.

다음날, 바로 읽기 시작하면서, 서커스라는 세계, 그리고 그가 만난 로드레이 공중그네 곡예단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조금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내가 잘 몰랐던 나우웬을. 그에게 일어난 심장 발작과 호텔 창문으로 구조되는 과정 등을.

나우웬의 상처와 허기짐, 대식가, 열정, 순수함, 사람을 대하는 어리버리하게 보일 만큼 순수하고 진실한 그의 마음과 태도, 예를 들면 자신의 새로 구한 대형 밴을 운전하기 겁내는 등, 구체적인 일 앞에서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상황, 때마다 하는 실수들, 그리고 빠르게 거기서 벗어나 어린아이같이 되는 모습, 누구에게도 완벽을 기대하지 않고 인간의 실수를 쉽게 받아들이는 일, 로드레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해 밴에 채워준 물을 아껴 쓰지 못한 일, 누군가에게는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 같이 보이는 모습, 실수하고 민망해하는 모습,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노인, 기혼과 미혼, 백인과 유색인, 동성애자와 무성애자와 양성애자의 차이, 기혼자와 성전환자의 차이, 그리고 금시초문인 많은 용어 사이의 경계를 지워가며 자신을 확장하는 성숙. 그리고 로드레이공중그네곡예단이 만난 느긋하고, 호기심 많고, 엉뚱하고 세심하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헨리를.


책을 읽으며 거의 끝부분에 있는, 1996년 7월 9일 일기를 읽으면서야, 처음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 ‘헨리가 로드레이 공중그네 곡예단을 만나 왜 그렇게, 거기에 몰두했는지’, ‘그들에 대해 어떤 글을 쓰려 했는지’, ‘그러나 왜 그렇게 쉽게 쓰지 못했는지’ 나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헨리가 추구한 육체와 영혼의 온전한 연합, 육화된 영성에 대한 열망과 발견에 대해 어렴풋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공중그네 곡예가, 그리고 곡예를 하는 사람이 곧 육화된 영성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리를 그는 그것을 눈으로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헨리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지만, 처음에 그것을 본 그의 감동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헨리가 자신도 모르게 공중그네곡예를 보면서 느낀 게 어떤 것이었을지, 또 헨리 자신이 그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과 마침내 알게 된 게 무엇인지, 내가 똑같이 느끼고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또 헨리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일은 로드레이 일행이 그랬듯, 고도의 훈련 끝에 숙련된 것이며, 사고의 소지가 심히 많다는 것도. (293)


“그들의 나는 동작과 잡는 동작을 보며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육화된 영성, (…) 그 영은 ’지금 여기‘의 몸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291)

“로드레이 일행을 안 뒤로 발판에 서 보기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역시나 올라서니 겁났다. 위아래와 사방의 공간이 끝없이 광활하고 무서워 보였다. (292) (잡는 사람에게 매달려) 그의 얼굴을 거꾸로 올려다보니 이렇게 매달린 채로 그네를 타는 기분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시종 즐거운 경험이었다. 행여 내가 공중그네 곡예사가 된다면 오늘이 거기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날이었다.” (293)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매달려있는 상황)


로드레이가 그 점을 말해줬다.


“헨리가 내 몸속에 들어와, 잡는 사람에게 날아갈 때의 희열과 무사히 돌아왔을 때의 쾌감을 느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291)


헨리에게 1996년 봄과 여름에는 스트레스가 많았다.(297)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 해째 일부 친구들은 그에게 게이로 커밍아웃해서 역할 모델이 되라고 권했다. 헨리의 성적 성향은 자칫 본인의 동의 없이 밝혀질 수도 있었다. 그고 그것을 알고 자주 불안해했다. 7월에 그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대해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성 문제는 죽는 날까지 내게 큰 괴로움을 안겨줄 겁니다. ‘해법’은 없다고 봐요. 전적으로 내 고통임을 인정해야지요. ‘관계를 통한 해결’은 무엇이든 재앙이 될 겁니다. 고통이 심할지라도 내 서원에 충실하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이 아픔에 열매가 많으리라 믿습니다.” (297)

그렇기에 그해 7월 초, 로드레이 일행과 이틀을 보내며, 함께 느긋하게 보낸 며칠은 요긴한 휴식이었다. 그리고 1996년 7월 31일 친구 네이선에게 속을 털어놓았고,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지난 몇 달간 나를 괴롭혀 온 불안에 대해 네이선에게 얘기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내면의 짐을 내려놓으니 약간 멋쩍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털어놓기를 아주 잘했다. 네이선은 내 고민을 들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내가 오랜 세월 이 아픔을 자기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품고 있었다는 점이 더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297)


이 모든 걸 경험하고 후, 헨리는 9월에 숨을 거두었다.


책은 죽음의 바로 코앞에서, 헨리가 겪었을지도 모를 불안, 탄식, 균형을 잃음 등, 그 질긴 두려움을 불러낸다. “혹시 자신의 인생이 아귀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무의미한 이야기였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힘을 잃는다. 돌이켜보면 어설프게 공중그네를 쥐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지만, 쾌활한 친구들 앞에서 그 창피함은 금세 즐거움으로 변했다. 도리어 그 친구들은 자신이 권한 공중그네 경험을, 열심히 그 기회를 살린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겉으로는 볼품없었으나 속으로는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그가 해낸 것이다. (305~306)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건, 헨리의 죽음 대목이 아니라, 로드리에 곡예단이 헨리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다음날 오후 무대에 뛰어올라 반짝이는 망토를 한 바퀴 휙 돌린 뒤, 이번 공연을 헨리의 영전에 바친다고 짤막하게 말하는 장면이다. 나도 그 순간 헨리를 마음속 깊이, 처음으로 뒤늦은 추모를 한다.


“헨리는 다른 사람들로 더불어 날고 떨어지는 붙잡는 자유를 찾고자 했다. 우리도 서로 연대하여 짐을 분담한다면 그만큼 힘이 나고 영적으로 새로워진다. 그 이유를 우리는 라르쉬, 셀마, 마틴 루터 킴 주니어의 장례식, 에이즈 팬데믹 때문에 모인 사람들, 공중그네 순회 곡예단과의 우정 등 헨리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_감사의 말 중에서(321)


헨리가 혼자 로드레이 공중그네곡예단에 관한 책을 쓸 수는 없었으나, 그가 남긴 기록들과 일기들을 통해, 캐럴린 휘트니브라운의 재구성으로 끝내 이 책이 나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헨리를 위해, 로드레이 공중그네 곡예단을 위해, 그리고 나와 독자들을 위해.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참 많다. 그 안에 영적 진리가 담겼을 그러나 우리는 모르는 타인의 세계. 서커스가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계라고 느꼈지만 나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헨리의 글을 읽으며, 그처럼 느끼며 서커스와 그 안의 공중그네 공연을 보고 싶었다. 로드레이 공중그네곡예단을 촬영한 영화, <그물 위의 천사들>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찾아보니 없다. 그가 글을 쓰기 위해 읽었다는 두 책, 시오도어 체니의 <논픽션 창작물 쓰기>와 또 다른 책 존 프랭클린의 <이야기 쓰기>가 국내에 없어서 아쉽다. 헨리 같은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었다는 게 사실 새롭게 다가왔고, 이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나도 이런 글쓰기를 하고 싶어 읽고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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