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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Nov 01. 2023

10월 31일

새벽 실내공기가 차갑다. 눈을 떠도 일어나기 싫어진다. 그래도 일어난다. 처음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걷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침 일찍 수영장에 가는 시간이 아까울 리 없었다. 시간이 흘러 몸이 회복되니,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좋다. 아침형 인간이다. 오전에 체력이 다떨어진다. 오후에는 책상에 앉는 게 힘들다. 오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점심 후에 수영장에 가고 싶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이미 S와 L 두 언니를 만난 게 6년, 내게는 없는 줄 알았던 의리가 작동해,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게 나의 성숙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그 관계를 위해 일어나기 싫은 몸을 일으켜 수영장에 가기 전 일정 분량의 글을 읽고 쓴다.      




어제 엔도 슈사쿠의 책, <내가 만난 예수>를 주문했다. 오늘 온단다. 나머지 책 몇 권은 마포중앙도서관에 가서 빌려오기로 했다. 엔도의 책이 다 그랬지만 내게 큰 영향을 끼친 엔도의 책은 <깊은 강>이다. 그 안에서 내가 만난 엔도와 예수가 내가 생각한 그와 그가 만난 예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쓴 <내가 만난 예수>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엔도 슈사쿠가 빚어 만든 예수>와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까지  읽을 수 있다면 더 정확하겠지만 품절이다. <깊은 강>은 작은딸에게 가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자기 집에 있는지 확인하고 가져오겠다고 했다.




아직은 엔도의 책이 내 손에 없으니, 아침 시간과 전철 안에서 오가는 시간에는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 그동안 알지 못했고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움을 담고 있는 책이다. 오늘 교회가 이런 책들을 읽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학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는 건 불가하다. 어차피 과학이란 현상을 확인하고, 현상을 통해 제 1 원인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과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조너선 섹스의 글을 읽으며, 하나님이 말씀(언어)으로 창조하셨다는 게 이리도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말(언어)이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언어는 먼 과거를 기억하고 먼 미래를 개념화하는 능력이 있다. 보이는 것과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꿈꾸게 한다. 그 언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고유성의 핵심 중 하나다. 하나님은 과학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언어로 세계를 만드셨다. 상상하시고, 그대로 되게 하셨다. 보시기에 좋게. 우리도 말(언어)로 인간 세계를 만든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과학 이전에 우리의 언어로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상한다. 오늘 우리의 문명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안에 과학이 따른다. 과학 역시 우리 상상의 언어에서 출발했다.

창조의 3단계에 대한 놀라운 이해를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조너선 섹스|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비로소 얻는다. 과연 성경은 역사도 신화도 아니다. 철학이며, 자유로운 인간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래서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도 배신자가 될 수도 있으며, 각각 자신의 결정하는 대로 되어갈 테니 말이다)' 철학이라는 조너선 섹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창조의 세 단계에 대해 조너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있으라라고 말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그대로 되더라의 단계다. 세 번째는 참 좋다(that it is good)라고 보는 단계다.

진정으로 창의적인 것은 과학이나 기술 자체가 아니다. 말이다. 말이 모든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어서 생각할 수 있고, 보이는 것과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창조는 창조적인 말, 아이디어, 비전, 꿈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고유성의 핵심에 있다. 언어는 먼 과거를 기억하고 먼 미래를 개념화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연 세계를 지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말로 인간 세계를 만든다. 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역할 수 있다. (41, 42)

다음은 “하나님이 이르시되…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조의 두 번째 단계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단계다.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별개다. 의도와 사실, 꿈과 현실 사이에는 투쟁과 반대, 인간 의지의 오류 가능성이 놓여 있다. 시도하고 실패해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고, 세상은 그대로이며, 모든 인간의 노력은 실패로 끝날 운명이라 결론을 내리는 건 그리스적 생각이다. 유대교 입장은 그와 반대다. 하나님은 선한 의도를 행위처럼 여기시고, 인간이 좋은 의도를 가질 때, 하나님은 그것이 행동이 되도록 개입하신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그것을 성취할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미리 프로그래밍 된 기계가 아니다. 의지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시듯이 우리도 자유롭고, 전체 토라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서 책임 있는 자유를 행사하도록 하는 인류에 대한 부름이다. 의지는 “있으라”에서 “그대로 되니라”로 가는 다리다. (42, 43)

끝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단계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일부가 되어 세상과
 싸우고, 그 기쁨을 맛보고, 그 영광을 기념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창의성을 낳는 것이다. 비판이나 부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내고, 그들이 그것을 보고 인식하고 소유하고 또 그것을 살아내도록 도와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역시 창조 역사의 일부이며, 가장 미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장점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 장점을 창조하는 것 이상을 하고, 그 장점이 창의적이 되도록 돕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43~45)      

이해가 되면서도, 조너선 섹스가 말했듯 창조의 단계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당장 ‘금수만도 못한 놈’으로 생각되는 이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미제라블> 의 미리엘 신부가, 또 예수가 떠오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역시 안다. 사랑은 위험을 동반하며, 그 위험을 무릅쓴 사랑이 결국은 사람을 만들어간다. 마음에 깊이 새기고 선한 의도를 갖고 노력해야겠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리라.           




수영장에 갔다가 마포중앙도서관에 가서 엔도 슈사쿠의 책 네 권을 빌려왔다. <침묵의 소리> <인생에 화를 내봤자> <바보> <깊은 강> 네 권을 빌렸다. <침묵의 소리>는 침묵이라는 제목 때문에 오해를 받은 <침묵>에 대한 해명으로 <침묵>이 나온지, 25년 만에 엔도가 쓴 글이라니, 나 또한 오해한 건 아닐지? <침묵의 소리>부터 붙잡았다. 집에 오니 어젯밤에 주문한 <나의 예수>가 와있다.  이제는 엔도 슈사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겠고, 엔도를 좋아하는 이로 불리어도 조금은 덜 민망하겠다. 더 안전을 기하기 위해 품절인 <엔도 슈사쿠가 빚어 만든 신>을 뒤졌는데, 용케도 쿠팡에서 주문할 수 있었다. 쿠팡에는 도무지 없는 게 없다.

500자, A4 1/3의 분량을 쓰는데 과거에 읽은 8권의 책에 이 정도 더 읽고 원고를 쓰면 내 양심에 거리낌 없을 것 같다. 이제 나는 과연 ‘엔도를 좋아하는 사람’ 맞다.      




수영장에서 마포중앙도서관으로 가는데 몸이 무거웠다. 내 느린 걸음으로 15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데, 결국 전철 한 정거장을 타고 갔다. 무거운 책을 들고 왔으니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고, 소화도 안 되어 힘들었고 일찍 누웠다. 나이가 하는 일이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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