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딸을 여의도 더현대 백화점에서 만났고 집에 와서 같이 자기로 했다. 아빠가 여행하고 집에 혼자 남은 엄마를 위한 배려다. 더현대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숏커트를 하니, 이마의 주름을 전혀 숨길 수 없고 거기에 백발에 가까운 흰머리가 그야말로 할머니임을 각인시켜준다.
바로 어제 예쁜 것과 매력 있는 것은 다르다는 엔도의 글을 읽고, 잠시 위로를 받았으나, '과거의 영광'(이건 진짜다)을 잃은 내 얼굴과 주름에 맘이 저린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어느 정도 매력적이라 나 스스로 느껴왔다. 그래서 화장품도 쓰지 않고 다른 관리를 전혀 받지 않는 걸 도리어 더 멋으로 생각했다. 사실 나라고 더 예뻐지고 싶지 않았겠나. 화장하면 단지 선크림만 바르더라도 저녁 세수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싫을 만큼 게을러서 그런 게 사실이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있다. 아름다움, 매력을 포기하고 잘 지낼 날이 온다면 바로 그때 인간의 나만의 매력이 드러날지 모른다. 아니다. 우리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그야말로 안쓰러웠다. 딸도 같이 늙어가는 게 안타깝다.
집에 돌아와 집 앞 채소 가게에서 사 온 단무지를 썰고, 후딱 시금치를 무치고, 계란말이를 해서 김밥을 말아 먹었다.
사돈이 몇 시간 째 전화를 안 받아 딸과 사위가 걱정한다. 혹 집에 쓰러져 계산 건 아닌가? 집에 가봐야 할까? 괜찮을 거야. 원래 핸드폰 잘 안 보시잖아. 피곤해서 잠드신 건 지도 몰라. 집안일 하다 보면 몇 시간 후딱 지나가. 라면서도 계속 신경을 썼는데, 사돈총각이 퇴근해 집에 가 연락했다. 보통은 그 시간이 주무시지 않는데 오늘은 주무셨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딸이 100% 땅콩버터가 몸에 좋다며 만들어줬다. 아침에 사과와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 체지방을 분해해 준다나? 딸들이 집에 오면 여전히 나는 엄마라 내가 아이들을 해먹인다. 그런데 아이들이 컸다고 꼭 뭔가 한가지라도 엄마 아빠를 위해 만들어주고 간다. 당근라페, 후무스 따위의 신식 음식을.
믹서의 컨테이너를 바꿔 물 없이 땅콩을 갈았다. 사용설명서가 눈에 읽히지 않은 지 오래라 믹서의 다양한 사용방법을 모른다. 대충 아무 버튼이나 누르며 땅콩을 갈다가, 아. 진짜 되는구나 싶은 순간, 본체에서 타는 냄새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상에~ 땅콩버터 만들다 비싼 믹서기 잡아먹었다 싶었다. 그러나 100% 땅콩버터가 확실히 건강한 맛이다. 비싼 편이지만, 앞으로는 사 먹어야겠다. 연기가 한참을 피어올랐음에도 두 시간 지난 다음 물을 넣고 돌려보니 믹서기가 작동된다. 멀쩡하다. 그렇지만 겁이 난다. 앞으로는 사 먹을까 싶지만, 또 사 먹기에는 믿음이 가질 않는다.
<비공식 작전>(1986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을 보다가, 한 번에 볼 수 없어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원래 영화 한 편을 한 번에 보는 게 어렵다. 그런데 오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김치를 버무려 넣고 수영장에 갔다 와서 여의도까지 가서 딸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