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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Nov 18. 2023

11월 13~15

11월 13일

남편이 집을 비우니, 사과 하나 먹기가 참 버겁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L 언니네 집에 가서 김장 후에 남긴 김칫속과 절인 배추를 싸 먹는 호사를 누렸다. 언니가 남은 김칫속과 절인 배추를 싸주기까지 했다. 웬 복인지 싶다. 홈플러스에 아주 커다랗고 깨끗하고 이쁘기까지 한 배추가 생각난다. 3개 한 묶음에 6300원이라니. 나도 이 배추를 사고 싶어 눈에 아른거리지만, 자신이 없다. 배추를 사들이고 무를 사들일 자신이 없다. L과 S언니 모두 갈팡질팡. “네가 그거 하다가 허리 아작난다. 하지마라”, “해봐. 할 수 있어.” 나도 갈팡질팡.




11월 15일

결국, 배추를 사 왔다. 두 언니가 카트에 실어주고, 그것을 한 통씩 나눠 큰 시장 가방에 나눠서 담아 차에 실어줬다. 이런 언니들이 내게 있다니. L 언니네 들러 언니가 담궈 놓은 마늘 간장 장아찌까지 싣고 왔다. 배추 한 통씩 갖고 올라왔다.

언니들이 가르쳐준 대로 다라이에 천일염을 풀어 밤에 배춧잎 하나씩 떼어내 그 소금물에 담궜다. 어쩌면 이리 예쁠까? 나이 70이 되어가는 여자가 배추에 바로 소금을 뿌려 절이던 여자가 소금을 녹여 그 물에 배추를 절인다는 걸 처음 알고 시도할 것이다.




“거룩한 장소, 맑디맑은 세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가장 더러워진 곳, 인간의 냄새가 어디에나 배어있는 신주쿠의 좁은 골목이나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리스도가 걸어 다니시는 소설을 써보게, 라고 그는 나에게 부탁했던 것이다.”_ <바보>(엔도 슈사쿠

문학과지성사) 349. 옮긴 이 해설 중.


엔도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친교가 있었던 조르주 네랑 신부가 엔도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 네랑 신부를 모델로 엔도는 중간문학으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신주쿠를 걸어 다니시는 그리스도를 그려낸 작품, <바보>를 썼다고 한다.




집에 돌아왔다가 빌려온 책들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마포중앙도서관×박정희도서관이 함께 하는 인문학 살롱” 광고가 붙어있다. ‘이게 가능한 조합인가? 불가능하다는 건 내 편견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향해, 바보, 가스통 보나파르트가 "희선. 안돼~"라고 할지 모르겠다.


2001년 <침묵>을 시작으로 대학도서관에서 엔도의 책들을 빌려 읽었다. 2011년인가? <깊은 강>을 읽었고, 이제 12년 만에 다시 그의 책을 손에 들었다. 다시 읽기를 잘했다. 기왕에 잡은 거, 읽지 않은 엔도의 책을 다 읽어보자 결심했고, 오늘도 엔도의 책을 빌려오려고 했는데, <사무라이> 외에는 내가 읽지 않는 다른 게 없다. 예전 내가 대학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들조차 없다. 나라의 도서관 사정이 이렇다. 그런데 이번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있던 도서지원정책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별수 없이 <사무라이>와 조성기의 <사도의 8일>(한길사)을 빌려왔다.

빌려온 책은 놔두고 읽고 있던 <나를 사랑하는 법>(엔도 슈사쿠

북 스토리)을 붙잡고 있다가 이런 글에서 멈췄다.


“자기혐오,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모든 면에서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열등감을 극복해내는 순간, 세상은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면허를 준다.”


‘글쎄~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까?’ 싶지만, 저자에 대한 신뢰로 완독하기로 했다. 나는 완독에 대한 강박이 있다. 다 읽지 않으면 뭔가를 놓치고 넘어갈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불안’이 원인이다. 에니어그램의 전형적인 5번 유형이 갖는 불안 혹은 열등감 때문이다. 완독하면서, 아주 사소한 듯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얻은 경험이 결코, 적지 않았던 것도 이유다. 이때 얻는 즐거움이 계속해서 책을 붙잡게 하는 동력이 된다. 이 책 역시 완독하기를 잘했다. 엔도라는 사람과 그의 삶을 알게 해준다. 나는 사람 알아가는 걸 좋아한다. 평전을 좋아하는 이유다.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빅토르 위고>(막스 갈로

비공)을 함께 읽었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요즘 엔도의 책을 붙잡은 것은 엔도의 책을 소재로 500자 원고청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엔도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수락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고 글을 쓰면서 모르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엔도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나를 의심했다. 내가 알고 있고 좋아한다는 바로 그 엔도가 과연 실제의 엔도일까? 하는 의혹. 그래서 가능한 대로 읽지 않은 엔도의 책을 다 읽어보기로 한 것.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다는, 그러나 실은 무한한, 나와 우리의 신에 대해 과연 나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그 만큼에 대해서라도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러니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 더 꾸준히 마음과 생각을 열어놓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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